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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점을 점령한 중국 보따리상 '다이궁'의 세계를 엿봤다

면세점의 큰손

지난 31일 이른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 면세점 앞에 중국 보따리상(다이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면세점 개장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서있다. 
지난 31일 이른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 면세점 앞에 중국 보따리상(다이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면세점 개장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서있다.  ⓒ한겨레

▶ 면세점 쇼핑은 여행 전 즐거움 중의 하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시내 면세점에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중국 보따리상(다이궁)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됐다. 시내 면제점 앞에는 이른 아침 한없이 늘어서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내 면세점업계를 쥐락펴락하는 다이궁들의 세계를 엿봤다.

서울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본점 앞에는 매일 매장 문이 열리기도 전인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목에는 명찰을 걸고, 등에는 백팩을 메고,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대화는 중국어로 한다.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에도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줄을 서 있었고, 기온이 영상 1도까지 떨어졌던 지난달 말에도 롱패딩으로 중무장을 한 채 서 있었다. 이른바 ‘다이궁’(중국인 보따리상)들이다.

지난달 국정감사에서는 다이궁들의 ‘면세점 싹쓸이’ 문제점이 지적됐고, 최근에는 국내 면세점의 3분기까지 매출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지난 30일 소공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그들과 함께 줄을 섰다.

면세점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줄은 대로변까지 이어졌다. 경호요원 대여섯명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세우고 있었다. 한 경호요원은 “오전 8시부터 시작해 하루에 1000명 가까이 줄을 선다”고 말했다.

명찰·백팩·캐리어 ‘3종 세트’로 무장

백화점 매장 시간인 오전 10시30분보다 한 시간 이른 오전 9시30분, 입장이 시작됐다. 경호요원과 면세점 직원의 안내에 따라 순서대로 면세점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에 안에서는 중국어 밖에 들리지 않았다.

‘여기가 한국인가 중국인가’ 헷갈릴 때쯤 12층 면세점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과의 경쟁은 불가능했다.

다이궁들은 유명 화장품 브랜드 매장 앞에 앞다퉈 줄을 섰다. 특히 줄이 긴 매장은 엘지 생활건강 ‘후’, 아모레퍼시픽 ‘설화수’, 해외브랜드 ‘입생로랑’ 등이었다. 브랜드마다 줄을 관리하는 직원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줄을 서 있는 그들에게 중국인 가이드가 큰 가방에서 (미리 맡겨둔 돈을 환전한 듯한) 5만원짜리 지폐뭉치를 꺼내 나눠줬다. 이들은 현지 여행사의 보따리상 단체 모집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보였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면세점을 찾은 듯 보이는 다이궁들도 있었다. 이들은 제품 사진을 중국 에스엔에스(SNS)인 웨이신, 웨이보 등에 올려 실시간으로 주문을 받았다.

줄을 서있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구매자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들은 에스엔에스에 직접 상품을 올려 구매자와 거래한다. 일반적으로 다이궁들은 중국 현지 판매업자에게 물건을 보내고 판매업자로부터 수수료를 챙긴다.

사드 보복으로 유커 줄어들자
보따리상이 면세점 큰손으로
개점 전부터 1000명씩 줄서
화장품 중심 싹쓸이 쇼핑

면세에 VIP 혜택까지 받아
현지 업자나 SNS 통해 되팔아
외국인 현장 인도 제도 악용해
물건만 받고 항공권 취소 경우도

시간이 지나면서 매장 곳곳에는 화장품이 박스 채로 담긴 쇼핑백들이 쌓여 갔다. 특히 엘리베이터 앞 통로엔 물류창고로 헷갈릴 만큼 화장품들이 가득 쌓여 지나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기초 화장품은 상품 자체가 크게 무거운데다 한 사람이 구매 한도 갯수를 꽉 채울 정도로 많이 사다보니 카트를 이용해 옮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피를 줄이기 위해 포장을 다 뜯어 자신의 캐리어에 옮겨 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화장품 매장에서 물건을 살 땐, 제품에 대한 설명을 듣거나 직접 얼굴에 발라본다. 하지만 다이궁들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제품 이름만을 말했고 면세점 직원 역시 기계적으로 제품을 계산하고 포장했다. 화장품 브랜드인 ‘맥’ 매장의 립스틱 코너엔 젊은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들 역시 립스틱을 테스트해 보지 않고 수첩이나 스마트폰에 적어 둔 제품 이름만 직원에게 보여줬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었던 한 화장품 매장에 들어서니, 매장 직원이 중국어로 인사를 해왔다. 중국인이 아닌 것을 눈치챈 뒤 한국어로 인삿말을 바꿨다.

 “이 사람들이 전부 다이궁인가요? 개별 관광객(싼커)은 없나요?”(기자)

“오전엔 대부분 보따리들이죠. 목에는 명찰을, 등에는 백팩을 매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이궁이에요.”(매장 직원) 백화점 내 안내방송도 중국어, 직원들도 중국인이거나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이었다. 직원들은 대량 구매를 하지 않는 손님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개인 여행객으로 보이는 한 중국인이 ‘후’ 화장품 매장 앞 줄에 서서 초조한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4박5일간 한국 여행을 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그는 “부모님 선물로 ‘후’에서 화장품 세트를 사려고 했는데 언제 내 차례가 될지도 모르겠고, 내 앞에서 다 팔려서 못 살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오후 1시 면세점은 오전보다는 한산해진 풍경이었지만 몇몇 인기 브랜드 매장 앞엔 여전히 줄이 이어져 있었다. 롯데 면세점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내 면제점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매장을 벗어나니 한바탕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한국 속 중국’에 다녀온 기분도 들었다. ‘다시는 시내 면세점에서 물건을 살 생각은 하지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면세점 상품을 다이궁들이 싹쓸이한다면, ‘관광 산업 활성화’라는 면세의 애초 취지도 무색해진 것이 아닐까.

면세품 ‘현장 인도 제도’ 악용

중국 정부가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대한 보복 조처로 단체관광객의 한국 방문을 제한하면서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은 크게 줄어든 상태다. 하지만 올해 면세점 매출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한국 면세점협회 자료를 보면 올해 1∼9월 면세점 매출은 129억1736만달러(약 14조5643억원)로 집계됐다. 9월인데 이미 지난 한해 면세점 매출(128억348만달러)을 넘어섰다.

면세점 매출은 올해 들어 지난 1월 월간 기준 사상 최대(13억8006만달러)를 기록한 뒤 3월 15억6009만달러로 다시 한번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4월 매출은 15억2423만 달러로 역대 2위, 9월은 15억1935만 달러로 역대 3위를 각각 기록했다.

유통업계에서는 면세점 매출 증가를 다이궁의 구매액이 늘어난 결과로 보고 있다. 과거 면세점의 주요 고객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었지만, 사드 보복 이후 다이궁과 개별관광객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다이궁의 구매액 증가는 중국인들의 한국 방문이 제한되면서 다이궁을 통한 대리구매가 증가한 결과로 분석된다. 여기에 최근 중국에서 ‘웨이상’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한 것도 다이궁 구매액 증가에 한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웨이상’은 온라인에서 에스엔에스로 상품을 판매하는 사업으로, 다이궁은 웨이상업체에 상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다이궁들은 한국에 보통 한두달, 길게는 석달까지 장기 체류를 하면서 물건을 사서 밀반입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으로 보낸다. 면세혜택에 더해 면세점에서 대량 구매자에게 주는 추가 할인이나 브이아이피(VIP) 혜택까지 받아 국내 소비자 가격의 60% 수준으로 물건을 구매한 뒤, 중국 현지에서 국내 소비자 가격보다 10% 가량 비싸게 파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면세점에서 구매한 물건을 중국 현지에 파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유통시키는 다이궁도 있다. 일부 다이궁들은 면세품 현장인도 제도를 악용하기도 한다. 시내면세점에서 산 면세품은 공항에 있는 출국장에서 넘겨받는 것이 원칙이지만, 외국인은 현장에서 즉시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런 제도를 악용해 일부 다이궁은 예약한 탑승권으로 면세품만 산 뒤 탑승권을 취소하는 방식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박영선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관세청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시내면세점 국산품 매출액은 3조6천억원으로 이 중 외국인이 현장에서 인도받은 매출액은 2조5천억원(70%)에 이른다.

박 의원은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총 217명이 탑승권을 빈번하게 취소하고 1인당 최소 1억원의 면세품을 대량 구매 후 시장에 되팔았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중 한 명은 무려 192번 탑승권을 취소했다. 한 사람이 면세품을 구입한 최대 금액은 10억7500만원이나 됐다. 지난 8월엔 한 면세점 직원이 국내 화장품 판매업자와 짜고 중국인 명의로 샴푸 17억원어치를 시내 면세점에서 빼돌린 뒤 국내에 불법 유통시킨 것이 관세당국에 적발되기도 했다.

 관세청은 지난 9월부터 항공권 예약을 자주 취소하거나 장기간 출국하지 않으면서 시내 면세점에서 빈번히 고액의 면세품을 사는 외국인에 한해 현장 인도를 제한하고 있다. 관세청이 제한 대상자를 선정해 면세점에 전달하면, 면세점은 이들에게 공항 면세품 인도장에서 물건을 찾아가라고 안내하는 방식이다.

관세청 관계자는 “내부 기준에 따라 600여명을 현장인도 제한 대상자로 선정했지만 시행 초기라 계도 위주로 하고 있다. 40여명만 먼저 면세점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그는 “악용 우려가 있어 기준은 밝힐 수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 30일 서울 소공동 롯데면세점 12층 매장에 한 중국인이 서있고, 옆에 쇼핑백들이 쌓여있다. 
지난 30일 서울 소공동 롯데면세점 12층 매장에 한 중국인이 서있고, 옆에 쇼핑백들이 쌓여있다.  ⓒ한겨레

매출 늘었어도 수익은 급락

지난 8월31일, 중국에서는 온라인 판매업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법안인 ’중국인민공화국 전자상무법(전자상거래법)이 통과됐다.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는 이 법은 다이궁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온라인 판매를 하려면 사업자 등록, 행정허가 등 각종 절차를 밟아야 하고, 세금 납부 의무도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법의 여파로 다이궁의 구매가 줄어들까봐 국내 면세점 및 유통업계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다른 편에선 면세점 매출을 계속 다이궁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다이궁은 면세점 매출액은 끌어올리지만 수익은 그에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1위인 롯데면세점의 경우 지난해 매출이 5조4544억원이었지만 영업이익은 25억원에 그쳤다. 영업이익이 전년(3301억원)과 비교해 99.3% 급락했다. 매출이 늘었는데도 이익이 줄어든 것은 다이궁을 유치하기 위한 ‘송객 수수료’ 때문이다. 송객수수료는 외국인 관광객을 면세점에 데려오는 대가로 여행사나 가이드에게 면세상품 판매액의 일정 부분을 떼주는 돈이다.

송객수수료가 20%일 경우 면세점이 100만원어치를 팔면 여행사에 20만원을 수수료로 주는 것이다. 지난달 중국 국경절 시즌(10월1일~7일) 즈음에는 평소 20% 안팎이던 송객 수수료가 40% 선까지 뛰기도 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2013년 2천억원 규모이던 송객 수수료는 지난 해 1조1천억원 규모로 4년 사이 5배 이상 상승했다.

화장품업계에서도 물건을 대량으로 사가는 다이궁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다이궁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간 상품들이 현지 시가보다 저렴하게 팔리거나 한국으로 역수입돼 들어오면 브랜드 이미지에 손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요 화장품 브랜드들은 1인당 구매 개수를 제한하고 있기도 하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말부터 1인당 브랜드별 상품 5개씩으로 구매 제한을 뒀으나 이후 매출이 떨어지자 지난 7월부터 2천달러(223만원) 한도 내에서 1인당 품목별 5개씩으로 규제를 완화했다. 현재 엘지생활건강은 브랜드 후의 ‘공진향 인양 3종’ 등 세트 제품 6개와 브랜드 숨의 ‘워터풀 3종’ 등 세트 제품 2개 상품에 대해서는 최대 5개까지만 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 국내인은 면세점 구매액수는 1인당 3000달러로 제한하고 있지만, 외국인의 구매액수는 제한이 없는 상태다. 관세청 관계자는 “다이궁의 면세점 대량 구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며 “현재 관련 업계와 함께 현장 인도 개선방안 등 종합대책을 마련 중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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