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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해도 되는 신분

ⓒhuffpost

운전 중 전방으로 뛰어들어온 외국인을 차로 칠 뻔한 적이 있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그는 제자리에 풀썩 쓰러졌고, 황급히 차에서 내려 몸을 흔들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휴대전화기를 꺼내 구급차를 부르려 할 때, 그는 왁! 하고 소리지르며 일어나 나를 놀래켰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에게 조심히 운전하라는 말을 남기고서는, 그는 윙크를 찡긋 날린 채 유유히 가던 길을 갔다.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지? 의아한 느낌 뒤로 패배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그였다면 운전자의 고개가 땅으로 꺾일 때까지 화를 냈을 것 같아서. 혹은 운전자가 먼저 눈 똑바로 달고 다니라고 내게 화를 냈거나. 그 상황에서 두 사람의 한국인이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은 뒤 헤어지는 장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예상 불가능하게 낙천적인 유머감각,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장난의 각본을 떠올려내는 천재적인 순발력, 단 한마디 비난도 없이 상대의 자책감을 이끌어내는 너그럽고 세련된 표현력을 가진 그 남자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유아적인 인간인 것만 같았다. 그와 나의 차이를 만들어낸 문화적 변수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본 뒤, 일상에서 화를 내지 않고 살아보자고 다짐했었다.

우리 사회의 공공질서는 분노할 신분이 순환하면서 유지되는 것만 같다. 함부로 흡연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허용되지 않는 장소에 차량을 주차하면 즉각적인 타인의 짜증과 분노에 직면하게 된다. ‘공공적인’ 규범 위반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짜증과 분노를 ‘사적으로’ 표출할 자격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규범 위반을 목격하면 한국인들은 마치 사적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당한 것처럼 감정을 크게 드러낸다. ‘불편의 실제적인 크기’가 아니라 ‘자격의 우월성’에 기반하여 드러내는 감정이므로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가 쉽게 정당화된다. 이 적대적 감정 표현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사소한 공공규범 위반에 대해 죄인이 된 기분으로 타인의 분노를 감수해본 사람은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 발을 살짝 밟고 지나간 행인, 사소한 신호 위반을 범한 차량 운전자를 만났을 때도 자비와 관용 없이 분노로 되갚을 기회를 붙잡는다. 이번엔 자신이 화를 낼 신분을 획득했다고 느끼면서.

‘신분’으로 행사되는 분노는 권위적이고 계급적인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상사다운 대접을 받지 못해서 부하를 폭행하고, 소비자다운 대접을 받지 못해서 아르바이트생을 살해하고, 가장다운 대접을 받지 못해서 가족을 살해하는 등의 반복되는 폭력 범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가해자들은 분노할 만한 일에 합당한 수위로 분노를 표현하지 않았다. 적당히 분노할 수 있을 때 최대한의 분노를 표출했다. 확고하게 보장된 ‘분노해도 되는 신분’에 도취한 나머지 선을 넘어 사고를 친 느낌마저 든다. 내 생각에 이들은 지극히 한국적인 분노 문화를 배양액으로 먹고 자란 괴물들이다.

분노가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닐 터다. 사회를 향한 구심점이 분명한 분노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에너지를 지나치게 자주, 또 많이 일상에서 쏟아내 소진시키고 있다.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에서는 국제질병분류에 포함되지 않는 분노증후군인 ‘화병’을 한국 고유의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다는데, 분노가 질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전염성을 가진 질병이라고 믿는다. 분노해도 되는 신분을 일상에서 너무 당연하게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이 문화적 질환의 창궐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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