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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9일 16시 14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10월 29일 16시 14분 KST

덕질이 우리 삶에 가르쳐주는 것들

[이 나이에 덕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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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화제다. 드라마 자체보다 남자 주인공 정해인에 더 열광하는 분위기다. 오로지 나만 바라보는 잘생긴 직진 연하남, 누나들의 로망 아닌가. 게다가 정해인은 눈웃음마저 예쁘다.

그렇다고 내가 정해인에게 ‘꽂힌’ 건 아니다.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 현실적인 감흥은 없다. 끝은 이미 짐작이 가능하다. 모든 연애의 끝은 이별 아니면 결혼이니까. 이별로 향해 가는 사랑, 혹은 결혼으로 방점을 찍는 사랑뿐이다. 지극히 이분법적인 것 같지만 다른 옵션은 모르겠다. 아련한 첫사랑도 대전제는 ‘이별’이니까.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자물쇠를 단단히 채워가는 것도 ‘끝’을 머릿속에 그리기 때문일 것이다. 수십 년간 수많은 ‘끝’을 경험하면서 회의적인 인간이 됐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싶다.

끝과 시작은 연결돼 있고, 어차피 시작은 끝으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시작한다고 기뻐할 것도, 끝났다고 슬퍼할 까닭도 없다. 감정은 그런 과정 속에서 침잠해간다. 아니, 식어만 간다. 감성은 딱딱한 돌덩이가 되어 간다.

첫째가 열한 살, 둘째가 아홉 살. 나는 지금 일을 쉬고 있다. 작년 말 결단을 내렸다. 6개월 남아 있던 둘째 육아 휴직을 감행했다. 휴직계를 제출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릴 시간이었다. 그나마 내가 다니는 신문사는 육아휴직에 관대하다. 남자 후배들도 주저 없이 1년씩 육아휴직을 쓴다.

낙제점으로 향해가는 나의 삶에 올바른 항로를 찾고 싶었다. 일이나 육아에서 프로답고 싶지만 나는 늘 아마추어 같은 모습이다. 나를 온전히 반쪽으로 나눠 일과 육아에 전념하고 싶지만 이는 말로만 가능한 일이다. 삶의 추는 항상 어느 쪽으로든 기울었고, 다른 쪽의 나는 민폐적 상황에 부딪쳤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삶에서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고 싶었다. 삶이라는 테이프는 도돌이표처럼 반복 재생되는데, 포즈 버튼 한두 번 정도는 눌러줘야 할 것 같았다.

일에서 일을 뺐는데도 나의 삶은 여전히 바쁘다. <24시간이 모자라>가 계속 귓속을 맴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익숙하게 만드는 일을 무한 반복한다. 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어느새 다른 일로 채워진다. 아이들의 아침을 늘 함께해주고, 집안일을 하며, 수업이 끝날 무렵 학교로 가서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다. 교문 앞에 서있는 엄마를 보면 아이들은 환한 미소로 뛰어온다.

‘부모’가 아닌 ‘학부모’ 역할에 나름 충실하고 있다고 자위하지만 육아는 늘 어렵고 답답하다. 남편이나 시부모님 모두 ‘엄마가 전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도 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엄마였던 사람은 없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하다 보니 어느새 엄마가 돼 있다. ‘문득’은 물론 아니다. ‘엄마’는 내가 자발적으로 택한 길이다. 가끔씩 남편한테 말하고는 한다.

“당신 엄마와 나를 동일시하지는 마.”

그래도 남편은 나에게서 시어머니의 모습을 찾는 것 같다. 마치 처음부터 엄마였던 듯 ‘아내=엄마’의 등호가 어느새 자리 잡고 있다. 언제나 “자기가 더 잘하잖아”라고 핑계를 댄다. 그러나 남편이 ‘아빠’가 처음이듯 나 또한 ‘엄마’는 처음이다. 도대체 아이를 낳자마자 엄마가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엄마도 아기처럼 목을 가누는 것부터 배운다.

회사를 다니면서 늘 하던 온라인 게임을 휴직 후 접었다. 신기하게도 회사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사라지자 자연스레 게임과도 멀어지게 됐다. ‘현질’을 해서 모은 아이템이 많던 앱도 지웠다. 한때는 게임 아이템 구입으로 콘텐츠 이용 요금이 7만 원 넘게 나온 적도 있었다. 승부욕은 엉뚱한 데서 발로된다. 내가 게임을 했던 것인지, 스트레스가 게임을 했던 것인지 지금은 모르겠다. 다시 복직하면 앱을 되살리게 될까.

매일 밤마다 하던 ‘강다니엘’ ‘워너원’ 검색 횟수도 조금 줄었다. 이젠 누워서 한참 동안 기사를 읽거나 영상을 보는 일도 적어졌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생각이라는 것을 지우고 싶을 때, 아이들 등교 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또 습관적으로 휴대폰 검색어에 ‘강다니엘’을 치기는 한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그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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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덕은 절대 아니다. 강다니엘만 한 ‘현실 망각’의 도구가 아직 없다. 아직도 나는 그를 아주, 많이, 진심 응원한다. 방송사고 같은 자잘한 실수가 나와도 그럴 수 있다 싶다.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완전함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구속이다. 실수를 하면 오히려 인간적이어서 좋다. 실수를 통해 하나 더 배우면 된다.

새로운 앨범이 발매되면 역시나 예약 구매를 한다. 출퇴근 시간이 사라지면서 차 안에 있는 시간도 줄어 음반 들을 시간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산다. 집에서는 그냥 유료로 가입한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반복해 듣는다. 한가지 일에 열정적으로 달려들 수 있다니 나 또한 놀란다. 맥주를 사도, 치킨을 시켜먹어도, 일부러 워너원이 광고한 것을 고른다. 과자나 초콜릿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이들과 슈퍼 갈 때마다 일부러 한 개씩은 집어온다. 워너원이 신한은행 광고 모델이 되면서 ‘휴대폰에 은행 앱은 깔지 않는다’는 신념도 버렸다. 강다니엘 사진이 박혀 있는 체크카드까지 신청했다. 내 월급 통장은 하나외환은행인데도 말이다.

강다니엘은 처음처럼 무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강고기’로 불릴 정도로 고기를 좋아하고 통후추나 얼린 파를 그냥 씹어 먹는 야성의 식성도 있다. 배고플 때는 현기증난다며 짜증도 낸다. 갑각류 알러지도 있다. 21세기 소년은 불쑥불쑥 텔레비전 화면에서 튀어나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워너원은 광고만 해도 25개 이상 찍었다. 이만큼 광고를 많이 찍은 아이돌이 있었나 싶다. 인지도와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일 것이다. 문화 곳곳에 워너원이 스며들어 있다. 10대를 기반으로 한 문화가 40~50대로까지 확장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콘서트 현장에도 한 번 가고 싶지만 그것은 조금 더 어린 친구들에게 양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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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 형부는 나의 아이돌 덕질을 존중은 하지만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한다.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면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데 아이돌 덕질은 그저 시간 때우기일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생산적 덕질’이 아니라고.

하지만 무슨 행동을 할 때 꼭 생산적이어야만 할까. 일상에서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생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취미까지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덕질을 통해 나의 생산적 활동을 잠시나마 멈추고 싶다.

게다가 요즘 아이돌 덕질은 자발적인 기부, 봉사 등의 긍정적 방향으로도 흘러간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과한 행동을 하는 팬들도 더러 있지만 이는 일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요즘 아이돌 팬들은 어떤 행동과 말이 ‘우리 오빠’ ‘우리 ○○’에게 도움을 줄지, 해를 가할지 잘 안다.

나는 강다니엘이 고맙다. 아마추어도 프로도 아닌 삶의 중간 지점에 있던 나에게 ‘프로’의 의미를 되묻게 했다. 무엇이든 완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냥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만 다하면 된다.

나 또한 20대 때는 그랬던 듯하다. 기자를 준비했던 나는 국민프로듀서가 아니라 신문사 임원들에 의해 선택됐지만 분명 그때는 ‘꿈’이란 것을 품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사를 쓰고 싶다는 그런 꿈. 그런데 지금은 많이 흐릿해졌다. 40대는 도전보다는 안정을 원할 때다.

21세기 소년의 열정이 불씨가 되어 20세기 소녀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다. 뒤늦은 아이돌 덕질의 이유는 그의 무대 위 열정이, 그의 티 없는 웃음이 마냥 부러웠던 까닭이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동경’의 의미도 된다.

한때 나도 거침없이 열정적이었으며, 불안한 미래와 상관없이 그저 순간에 충실하며 맑은 웃음을 짓고는 했다.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내가 갈구한 것은 어쩌면 워너원의 그 뜨거운 열정, 그 청량한 청춘이었던 듯하다.

청춘이란 것이 그렇다. 잊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와 사람 마음을 아리게 한다. 그래도 아직은 청춘이라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워너원, 그리고 강다니엘처럼.

 * 에세이 ‘이 나이에 덕질이라니(21세기북스)’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