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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윤리

ⓒШарынин Роман via Getty Images
ⓒhuffpost

세월호 참사 이후 희생자를 애도하는 글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중 몹시 불편했던 글이 오래 남았다. 매우 따뜻한 마음과 정의감이 엿보이는 글이지만 왜 불편함을 줄까 생각했다. 글쓴이는 유가족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애도하는 대상과 자신을 함부로 동일시하는 태도가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이 아마 ‘공감’으로 읽히나 보다. 나 역시 공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공감은 때로 폭력의 얼굴로 등장한다.

진정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연대하고자 한다면 그 슬픔과 고통의 주체를 함부로 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때로 공감하고 연대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슬퍼하는 나, 고통스러운 사안 앞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말하며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윤리적인가. 이 질문이 계속 맴돈다. 타인의 고통을 글의 재료로 삼아 궁극에는 자기 자신에게 사람들을 주목시키는 행동이다. 나 자신에 대한 묘사가 가득하여 타인의 서사를 잡아먹는다.

글쓰기를 미화하거나 심지어 신비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글쓰기는 많은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글쓰기는 자아도취의 끝없는 향연을 펼칠 수 있는 장이며 타인을 짓밟을 수도 있는 강력한 무기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이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글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얼핏 정의로워 보이지만 고통의 주체마저 바꿔치기할 수 있다. 고통의 주체는 발화자 혹은 목격자가 되고 정작 고통받은 타인은 이 발화자 혹은 목격자의 정의감을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소재’가 되고 만다. 누군가의 비극을 내 정의감의 매개로 삼는 행위는 일종의 속임수다.

살해된 피해자의 몸을 의사가 불특정 다수에게 언어로 상세히 전달하는 행위는 어떠한가. 참혹함의 정도를 묘사하면 사실에 접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방식은 자극과 선동으로 향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실’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그 고통을 대하는 윤리를 압도하는 순간 타인의 고통은 소외된다. 사실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은 ‘사실적인’ 묘사에 자극받는다. 묘사를 사유라고 착각하여 치밀하게 묘사할수록 치열하게 사유했다고 여긴다. 타인의 고통 위에 나의 목소리를 덮어씌우는 행동과 타인의 고통이 내 목소리와 연결되도록 하는 행동은 다르다.

한 사회 지성과 윤리의 척도는 애도와 유머를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타인과 슬픔을 공유하는 태도, 타인에게 웃음을 전달하는 태도에 깃든 윤리의식은 첨예한 지성의 분투를 필요로 한다. 유머, 곧 해학, 풍자, 농담 등이 사회의 약자를 조롱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도가 육체적 고통의 흔적을 낱낱이 묘사하는 방식에 머물고 있다면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의구심을 품어야 한다.

재현의 윤리에 대한 언급조차 너무 부담스럽다. 타인의 고통을 미학화하는 행동에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 그 시선들 때문에. 누구나 관음의 욕망이 있다는 옹호의 목소리 때문에. 만인이 작가인 시대에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직업윤리를 집어삼키는 일이 벌어진다. 착각과 달리, 전위적인 지성과 미학은 윤리적 고민을 품고 있다.

셀피를 찍어대듯, 오늘날은 ‘나’를 들여다보는 ‘나’들에게 집중한다. 내가 불쌍하고 내가 괴로워서 그따위 윤리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 보인다. 살인 사건 피의자의 얼굴 공개는 안타깝게 희생된 한 사람에 대한 애도와 무관하며 사건 수사와도 무관하다. 오직 ‘나’의 분노를 표출할 구체적 과녁으로 작용할 뿐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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