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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8일 18시 1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10월 18일 18시 12분 KST

나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걸 지켜보았다. '학대'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심리적 학대도 물리적 폭력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꼭 교육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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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님은 2013년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기 전까지 26년간 결혼 생활을 했다. 당시 나는 18세였고, 그때 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살인이 벌어지기 몇 분 전,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의 얼굴 오른쪽에서 자국이 피어올랐다. 나와 어머니는 밖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버지의 분노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우리는 보통 산책을 했다. 그게 잠깐이라도 아버지의 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우리 뒤를 바짝 따라왔다. 아버지는 나더러 다시 들어가라고 계속 말했다. “난 네 엄마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뿐이다.”고 부드럽게 여러 번 말했다. 나는 반발했지만 결국 서 있던 위치에서 몇 미터 벗어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등 뒤에서 총을 꺼내는 것을 공포에 질린 채 지켜보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이름을 외치자마자, 아버지는 어머니 가슴에 총을 여러 발 쏘았다.

내 비명이 어찌나 컸던지 거리에 울려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위의 나뭇가지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어머니는 자신의 피가 고인 웅덩이에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는 총알 7개가 어머니 몸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쏘았다.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나서 나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아마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서 있는 것이었을 텐데, 그날 오후 어머니를 두고 걸어갔던 데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저지르던 학대는 늘 심리적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내 아버지가 그런 극단적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나는 깨닫지 못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도 여러 해 동안, 그 깨달음이 가장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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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캘리포니아주 페어필드의 중산층 교외 지역에 살던 2009년 2월에 아버지의 육체적 폭력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TV를 보다가 어머니를 거실로 불렀다. 아버지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어머니에게 바닥에 앉으라고 했고, 어머니가 앉지 않자 아버지는 일어나서 어머니를 거칠게 흔들었다. 손으로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어머니의 팔에는 2주 동안 시퍼런 멍이 남았다. 아버지는 옆에 있던 나무 의자를 집어 들어 어머니에게 던졌다. 어머니는 옆에 있던 책장 뒤로 겨우 몸을 피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어나서 옷을 개고 방 정리를 하느라 바빴다. 열려 있는 방문으로 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내가 함께 미소 짓지 않자, 아버지는 문간에 서서 계속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억지로 웃었다. 그러나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하니 아버지를 절대 예전처럼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옷장에서 일기장을 꺼내 내 분노를 기록했다. “아버지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보호해주는 사람으로 느껴졌으면 좋겠다.”

내가 목격한 물리적 폭력에 충격을 받았지만, 사실 아버지의 감정적·심리적 학대는 늘 있었던 일이다. 나는 당시 아버지를 분노하게 만든 것들을 쭉 나열해보았다.

왜 아버지가 아닌 큰오빠의 번호가 어머니 휴대전화 단축번호 1번에 저장돼 있는가?

왜 우리는 아버지를 식탁 상석에 앉게 하지 않았는가?

왜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는가?

왜 아버지가 집에 돌아올 때 우리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가?(아버지에게도 열쇠가 있지만)

아버지가 세게 쥐어 상처가 났을 때, 어머니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경찰에 신고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아버지는 부엌에 있던 어머니에게 가서 ‘다시 한번 경찰에 연락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곧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매일 밤 아버지의 귀가 시간인 6시 15분에 맞춰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아버지를 진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파네토네와 파스타 플로라를 더 자주 만들었다.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노크하기 전에 문을 열었다. 내 남동생도 자주 함께했다. 나는 아버지를 껴안았고, 아버지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도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해야 했다. 집에서의 내 생활이 연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여러 주 동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손을 대지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공격했다. 어머니를 더욱 통제하기 시작했다. 기분 변화가 더욱 극단적으로 되었고, 예측할 수가 없었다. 굉장히 사교적이었던 어머니는 강제로 고립되었다. 아버지는 사소한 것을 가지고, 언쟁을 벌였다. 그래서 나와 형제들이 엄청나게 경계하며 어머니를 지켜야 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상황이 점점 불편해지면서, 집에서 겪는 불안정함이 학업에도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우등생이었던 나는 몇 달 만에 수업 시간에 잠이 들곤 했고 낙제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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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2008년의 불황에 큰 타격을 받았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2009년 여름, 우리는 중산층이 사는 교외에서 바예호에 있는 아버지의 컴퓨터 가게로 이사했다. 형제들과 아버지는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고, 어머니와 나는 옆 방의 창고를 같이 썼다. 손님들이 우리가 사는 가게 뒤편을 보지 못하도록 얇은 나무판을 세워두었다. 나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말 없는 항의의 의미로 첫 3개월 동안은 오빠 책상이나 비치 체어에서 잤다. 아버지는 올해 여름 한 철만 여기서 지낼 거라고 했다. 그러나 다섯 번의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

가게에 사는 동안 우리 가족이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지낼 일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되곤 했고, 우리는 두 사람 모두를 지켜봐야 했다.

손님들에게는 아버지는 참을성 있고, 너그러웠으며, 마음이 따뜻한 사람 같았다. ‘집’에서의 아버지와는 정반대였다. 우리와 있을 때 아버지의 기분 변화는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참을성이 없고, 차갑고, 위협적이고, 만족시키기가 불가능했다. 우리는 잠시 아버지의 관심을 옮겨가게 해주는 손님들을 고맙게 여기게 되었다. 우리가 잠시나마 안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겪는 학대의 물리적 증거가 없다면, ‘어머니의 안전이 우려된다’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어머니에 대한 물리적 공격은 몇 번밖에 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내가 몰랐던 것은 물리적 폭력이 학대자의 목적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학대자의 목적은 ‘피해자에 대한 권력과 통제’를 얻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지 않아도, 내가 아버지를 두려워하거나 어머니의 안전을 걱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일상적으로 물리적 폭력을 쓰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학대적 관계는 물리적 폭력이 있든 없든 거의 비슷한 역학으로 움직인다.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물리적 폭력을 쓰는 걸 본 2009년을 아버지의 학대가 시작된 시점으로 생각하곤 했다.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5년 뒤, 가장 친한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에서야 나는 아버지의 물리적 폭력이 내 평생 아주 드물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걸 내가 실제로 목격한 건수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정말 많은 사람이 학대자들, 가장 가까운 파트너를 죽이는 남성들에 대한 관념을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은 잘 때만 빼고 늘 물리적으로 폭력적인 사람을 상상한다. 아주 작은 잘못만 가지고도 파트너를 두드려 패는 학대자를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다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심리적 학대의 위험에 대해 나는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내 어머니를 구할 수는 없었다. 나는 물리적이지 않은 학대가 치명적일 수 있다는 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헤어지라’고 단호히 말했다. 연구에 의하면, 가정 폭력 피해자의 3분의 1 가까이는 최초의 물리적 폭력이 ‘살인’이나 ‘살인 미수’로 발현된 경우다. 심리적 학대는 미묘하기 때문에 더욱 그 영향이 서서히 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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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죽은 날을 상세히 기억한다. 아버지의 총에서 더 이상 총성이 울리지 않고, 아버지가 어머니 시체를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던 기억에 붙들려 있다. 나는 아버지가 총알이 없어서 그만 쏜 것일까, 아니면 마침내 만족했던 것일까 생각했다. 나는 골목에서 뛰어나왔지만,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몰랐다. 나는 길거리로 달려가 차 두 대를 멈춰 세웠다. 나는 말하는 법을 잊었다. 어머니의 시체와 아버지를 데려갈 앰뷸런스가 왔다. 그날 저녁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그들은 아버지가 한 경관에게 총을 겨눠서 경관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화가 난 채 앉아있었다. 아버지가 살아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 분노에는 원천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필요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을 다루기란 힘들다. 내 몸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대학을 중퇴했고, 직업을 잃었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 나는 약물치료와 세라피를 시도해보았고, 아무것도 내게 필요한 대로 되어가지 않자 평화를 절박하게 원하게 되었다. 굶었다. 며칠이 지나도 배고프지 않았다. 물을 마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의 비통함에는 독자적인 생명이 있다고, 내 괴로움을 뚫고 자라고 있다고, 그 밑에 깔린 사람보다 더 강하다고 확신했다. 나는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신과 흥정하려고도 해보았다. 늦은 밤에 나는 어머니가 살해당한 골목으로 걸어가 당시 장면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렸다. 몇 달 동안 매일 밤 차를 몰고 해가 뜰 때까지 바예호를 돌아다녔다. 비통함 때문에 망상에 빠져, 내가 열심히 찾기만 하면 어머니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죽고 나서, 나는 형제들과 소원해졌다. 우리 모두는 각자 외로이 자신의 비통함에 대처했다.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극도로 걱정스러웠다.

내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그들은 내 아버지가 한 일을 ‘치정 범죄’라고 하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해서 죽인 거라고 날 확신시키려 했다. 그다음에는 아버지가 당시 술에 취해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사람들은 개인적 질문을 하곤 했고, 그날 아버지의 동기가 뭐였냐는 등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졌다. 어머니가 뭘 했길래 아버지가 그렇게 화가 났을까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반응들로 나는 침묵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침묵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내 경험을 계속해서 숨길 수는 없었다. 특히 학대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도울 기회가 있다면 더욱 그랬다. 나는 정말 무척 돕고 싶었다.

나는 지금 가정폭력 피난소 두 곳에서 자원봉사하고, 지역 사회에서도 봉사 활동을 한다. 나는 ‘심리적 학대도 물리적 폭력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꼭 교육시킨다. 나는 폭력을 겪는 이들을 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했지만 없었던 존재 말이다.  

어머니는 늘 내게 영감을 주었다. 처음에는 살아있을 때 영감을 주었고, 지금은 죽어서 영감이 되어준다. 그 사건 이후 내가 물려받은 비통함, 그 사건으로 인한 어머니의 부재는 어머니, 나 자신, 혹은 과거의 나와 같은 이들을 돕겠다는 동기를 주었다.

어머니는 내게 누르(Nour)라는 이름을 붙였다. 빛을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이며, 신의 이름 99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내 이름이 어머니에게 받은 선물이고, 이 이름과 함께 특별한 것이 왔다고 믿는다. 이 이름은 빛이고, 나는 이 빛이 꺼지지 않게 할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가 그립다. 어머니가 내게 준 사랑에 감사한다. 그 사랑은 이제 나의 힘이다.

* 이 글을 쓴 Nour Naas는 미국 캘리포니아 바예호에 사는 리비아 작가이자 가정폭력 반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업을 더 보고 싶다면 nournaas.com를 방문하면 됩니다. 

* 허프포스트US의 을 번역,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