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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1살 때 가족들 앞에서 아웃팅 당했다

그 순간이 왔다. 내 선택이나 자신감 때문이 아니었다.

ⓒSADE COLLIER

조지아주 중부의 작고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인 크리스천 마을에서 자란 나는 내가 이성애자라고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7살 때 이웃의 여자아이와 동성간의 실험을 하다 걸렸던 경험에서, 나는 내 섹슈얼리티에 대해 근본적 불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아이의 가족은 당시 분노했던 반면, 내 가족은 그저 충격받고 불편해 했을 뿐이었다. 두 친구 사이에서 한 번 해본 경험이려니 하고 넘겼다. 나는 이 실험 이후 내 섹슈얼리티를 피하려 했지만,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늘 여자아이들에게 반해서 괴로웠다. 그래서 나는 늘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한 이 비밀, 즉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품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집이나 우리 지역에는 내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내 비밀을 풀어냈다. 나는 동네의 친구나 가족에겐 결코 커밍아웃할 수 없을 것 같아, 3D 아바타를 통해 타인들과 교류하는 IMVU 같은 곳을 밤늦도록 사용하기 시작했다. 혼자 있을 때면 내 성적 ‘상태’를 레즈비언으로, 양성애자로, 퀘스쳐닝으로 바꾸곤 했다.

내가 실제로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내 섹슈얼리티를 표현할 수 있는 출구가 생긴 것  같아 후련했다. 나는 10살 때 아이들을 위한 소셜 네트워크인 KidzWorld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사이트도 똑같이 쓰기 시작했다. 내 바이오에 양성애자라고 써두고 접속하지 않을 때도 오랫동안 그대로 놔두었다. 내가 그 상태를 놔둔 시간이 늘어나는 게 내 섹슈얼리티를 밝혀야 할 내 무의식적 필요와 관계가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11살이었던 2013년 여름에 나는 KidzWorld 활동을 많이 했다. 거기서 알게 된 여자아이와 곧 친구가 되었다. 그 아이는 자신도 나와 같은 것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먼곳에 사는 아이라 해도 나와 같은 사람을 찾으니 안도가 되었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편하게 여기는 그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내 현실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시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해 여름이 끝나기 직전, 나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먼저 말하기로 결심했다. 놀랍게도 그 아이는 나를 진정시켜주며 지지를 보냈다. 그 경험 덕택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지지 않아도 되는 짐이 내 어깨에서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농담을 하고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내 섹슈얼리티 때문에 나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안심시켜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기에는 아직도 너무 부끄러웠지만, 친구들이 받아들여준 것이 거부에 대한 공포보다 더 커졌다. 나는 커밍아웃하기 전의 아이로서는 가져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내가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할 정도로 자신감을 갖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해 가을에 그 순간이 찾아왔다. 내 선택이나 자신감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자주 어울리더 친구가 자기 이모집의 컴퓨터로 KidzWorld 계정에 로그인한 뒤 화면을 그대로 켜두었다고 한다. 이모가 친구 목록을 보다 내 섹슈얼리티를 밝힌 내 페이지를 보게 되었다. 이모는 친척에게 내가 “게이라고 말하고 다니더라”고 전했다.

그 말이 내 가족에게까지 전해졌다. 내 사촌이 자기 어머니와 내 삼촌에게 말했고, 그들은 우리 집에 와서 나와 함께 부엌 식탁에 앉아있던 내 어머니에게 말했다. 삼촌은 어머니에게 다가오며 “쟤가 자기는 게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아느냐?”고 말을 걸었다. 삼촌은 어디서 들었는지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 사촌을 통해 들었다고 나중에 인정했다. 나는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내 개인적 삶이 갑자기 침해당했다고 느꼈다.

나는 처음에는 부정했고, 정말이냐고 묻는 어머니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커밍아웃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의도와는 반하여 가족 전체에게 아웃팅 당했고, 그대로 앉아 내 삶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내가 게이가 아니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거절에 대한 공포가 다시 나를 압도했다. 그날 밤 어머니는 내 섹슈얼리티와 상관없이 나를 사랑한다며 온화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수치스럽게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에 언니가 나를 데리고 나가 차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는 내가 쌓아올렸던 스트레스를 풀어줄 방법을 찾아냈다. 언니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한다면 커밍아웃의 힘이 내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섹슈얼리티 때문에 거절 당할 것이 두려워 계속 우는 중이었다. 언니가 나를 안아주었을 때야 이미 가족 중에 내 편이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마침내 가족들에게 내 방식대로 커밍아웃할 힘을 얻었다.

이모의 집으로 차를 타고 가고, 전화를 하고, 받아들인다는 말을 듣고, 눈물 바다가 되었다. 사실이냐는 물음을 받았을 때 나는 어찌어찌 고개를 끄덕였고, 누가 안아줄 때마다 상대의 셔츠를 흠뻑 적셨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어머니가 나를 안으며 내 섹슈얼리티와 상관없이 나를 사랑한다, 넌 지금도 내 아이다라고 말했던 때였다. 커밍아웃이 이런 거였구나. 나는 비자발적으로 가족에게 아웃팅 당했지만,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할 기회도 얻었다. 하룻밤만에 나는 여러 해 동안 이해하려고 애써오던 정체성을 잃었다가 되찾았다.

5년 전에 아웃팅과 커밍아웃을 경험한 뒤로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각 경험의 역학은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해도 말이다. 난 이제 16살이고, 내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며 이제 범성애자(pansexual)이라고 생각한다. 성이나 젠더와 무관하게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혹은 로맨틱하게 끌릴 수 있다는 뜻이다. 몇 년 전에는 계속 부정해왔지만, 이제 LGBTQ+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의 역할도 찾았다.

아웃팅 당하고 커밍아웃하며 가족들과는 더 가까워졌다. 고등학교 때는 여자아이들과 사귀었고, 가족들에게 즉시 말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반한 사람(젠더와 무관하게)에 대해 떠들 수도 있었다. 처음에 내 섹슈얼리티에 대한 불편함이 있긴 했다. 이것은 나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걸 가족들에게 숨겨왔기 때문이다. 내 가족들이 나를 너무나 잘 받아들여준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하지 않아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자 나의 정말 중요한 부분을 가족들로부터 분리시켰던 것이 후회되었다.

나는 나를 아웃팅시킨 성인들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 기분이 어떤지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커밍아웃할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에 받은 침해감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이후 아웃팅당한 것에 대한 대처 방법을 찾아냈다. 가족들에게 퀴어 커뮤니티의 여러 면에 대해 끊임없이 알려주며, 내가 아웃팅 당한 것을 내 감정을 전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빼았겼지만 나는 내 섹슈얼리티를 온전히 되찾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내 섹슈얼리티를 되찾으며 나는 이것이 늘 내 것이었음을 느꼈다. 이 과정 전체는 내가 누구인지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는 여정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섹슈얼리티를 찾아나가고 있으며, 내 개인적 이미지의 역할을 어떻게 통제할지를 배워가고 있다.
*허프포스트US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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