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택시는 영단어 외우기 좋은 의자다!

ⓒmrtom-uk via Getty Images
ⓒhuffpost

얼마 전 미국의 한 출판사의 에디터이자 시인이 파주출판단지를 찾았다. 뉴욕에 거주 중이라는 그와 통역을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는데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너의 시에는 무시무시한 택시 기사님이 자주 등장하느냐고, 한국의 택시가 그만큼 위험한 거냐고, 뉴욕에 비해 택시는 깨끗하고 기사님들은 친절하던데 혹시 지어낸 이야기냐고.

영어로 번역된 몇 편 안 되는 내 시 가운데 택시에서의 일화를 담은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왜는 무슨 왜, 제발 그러지 좀 마시라고 쓴 거지, 그러는 너희 나라 택시는 늘 유쾌 상쾌 통쾌만 한 것이냐, 괜히 제 발 저린 기분에 농담처럼 반문을 하는데 그가 말했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주로 택시를 몰다보니 그들의 살아온 얘기를 자주 듣게 된다고, 그러다보니 택시를 타면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고, 그만큼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커진다고. 순간 움찔했다. 나는 한국에서 한국 사람이 아닌 이가 모는 택시는 단 한번도 타본 적이 없구나.

그래서일까. 어떤 택시든 타고 나면 어제의 뉴스든 오늘의 이슈든 우리들이 한국 사회의 모든 걸 공유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쓱 하고 말이 건너올 때가 있다. 일주일 전쯤이었을 거다. 서울역 부근에서 택시를 잡아 합정역 메세나폴리스요, 하는데 기사님이 아이고 아주 섹시하신 아가씨가 타셨네, 오늘 일진 아주 좋겠네, 하는 거였다. 네? 뭐라고요? 이미 올라탄 택시가 도로 안쪽을 파고들었으니 내릴 수도 없고 치미는 짜증은 어쩌지 못하겠고 해서 일단 한마디 쏘아붙이고 말았다. 아저씨 그런 말씀 그렇게 막 하시는 거 아니에요, 네? 기분 나쁘거든요. 나 참, 진짜 기분 나쁩니까? 이게 마 예전에는 다 칭찬이었다 아닙니까, 세상이 하도 마 각박해져서 뭔 말도 못하게 무서워라….

살짝 내린 창문 너머로 바람이 살살 밀려들어오는 가운데 기사님의 일방적인 독백이 시작됐다. 그러니까 안희정만 개새끼라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갸 혼자 박수쳤습니까, 한쪽 갖고 소리가 납니까? 싫으면 싫다고 안 하면 될 것을 여자들이요, 이중적인 게 밤에 택시 몰다 보면요, 나 꼬시는 승객들 참 많아요, 일단 앞에 타잖습니까, 그럼 술에 취해서 오징어 쩐 내 풀풀 풍기면서 아저씨는 무슨 손이 이렇게 두툼해요, 하고 확 잡아요, 자자고 조르는 여자도 많아요, 나 몸 좋다고 막 꼬집는다니까요, 내가 좀 하긴 하거든요, 와이프도 사족을 못 쓰죠, 나한테는. 그러니까 아가씨 내 말은….

저 아가씨 아니거든요, 그리고 전 안희정만 개새끼 같거든요, 됐죠? 어머 이런, 아까 인터뷰하고 나오면서 녹음기를 안 껐네. 이게 대체 몇 시간째 녹음중인 거람. 아저씨 저기 메세나폴리스 뒤쪽으로 돌면 홍익지구대 있거든요, 거기 세워주세요. 장윤정 버전의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가 숨죽여 흘러나오는 가운데 목적지 근방에 다다르자 기사님이 속력을 느릿느릿 줄였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경찰서엘 갑니까. 뭐 켕기는 거라도 있으신가보네, 그 앞에서 제가 내린다고요. 슬프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분노의 표출은 차문을 부서져라 처닫는 것뿐이었다. 왜냐? 힘이 세다고 했으니까,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으니까.

비단 이런 공포는 승객만의 몫이랴. 기사님도 승객이 타고 내릴 때마다 긴장으로 목뼈가 곤두서겠지. 언어가 통한다는 것과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역시나 다른 일임을…. 어쨌거나 뉴욕 가면 매일같이 택시 타보기를 버킷리스트에 추가했다. 참 영어 단어는 특히 택시 안에서 잘 외워지더라고 팁을 준 언니가 누구더라.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택시 #뉴욕 택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