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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날 때 나는 괴롭힘 당하는 십대 게이였다. 올림픽 선수가 되어 돌아왔다

ⓒDIMITAR DILKOFF via Getty Images
ⓒhuffpost

나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북서부의 작은 탄광 도시 레드 레이크에서 자랐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자동차로 5시간 반만 달리면 되는 매니토바주의 주도 위니펙이다. 레드 레이크에서 자란다는 건 여러 모로 멋졌다.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스포츠를 할 수 있었고, 호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배를 타기도 했고 겨울이면 설상 스쿠터도 탔다. 레드 레이크에서 보낸 내 어린 시절은 거의 대부분 좋았다.

8살 때 TV에서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을 봤던 걸 기억한다. 그건 내 삶의 가장 멋졌던 순간의 촉매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내가 겪은 가장 힘들었던 일들도 불러왔다.

레드 레이크에서는 하키가 아주 인기가 많았고 ‘남자 아이의 스포츠’라고 여겨졌다. 피겨 스케이팅은 여자 아이들이 하는 스포츠였다. 동네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유일한 남자 아이였던 나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아이들이란 못되게 굴려고 마음 먹으면 정말 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 놀림과 괴롭힘이 심했다. 내가 이 스포츠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두가 나를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ERIC RADFORD

‘나는 세상에서 게이가 나 하나뿐인 줄 알았다.’

나는 커리어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던 순간과 좌절스러운 순간들을 경험했다. 부상에 맞설 때나 괴롭힘을 겪을 때, 나는 왜 내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계속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경쟁심이 강한 것, 투지가 있는 것 때문이었겠지만, 또한 내가 언젠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 때문이기도 했다.

13살 때 놀라운 기회를 얻었다. 나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그뒤로 4년 동안 나는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다니며 매년 9월이면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벅찼지만 짜릿하기도 했다. 새로운 학교에서 새 출발을 할 때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아무도 나를 몰랐고, 나는 새 학교에 잘 섞여들기 위해 주의깊게 노력했다. 그 몇 년 동안 내 스케이팅 실력이 늘었고, 나는 서서히 선수 수준이 되어갔다. 또한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 출신인 나는 세상에서 게이가 나 하나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감을 할 대상이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15살 때 만나게 된 코치 폴 워츠는 내가 실제로 만난 최초의 게이였다. 그제서야 나는 이게 수치스러워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아진다

물론 가끔 레드 레이크에 갔지만, 내 고향에 대해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마주치지 않을까 두려워서 조심하며 걸어다녔다. 그 순간들을 지금 돌아보면 내게 찾아올 예정이었던 변화들은 정말로 놀랍다.

내 커리어가 잘 풀리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레드 레이크에 대한 내 내면의 감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레드 레이크의 시각도 달라졌다. 나는 이제 시간이 흘러갈수록 작은 동네들의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태도가 진화하고 개선될 것이라 믿는다. 더 많은 노출과 교육을 통해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공포는 서서히 사라져갈 것이며, 이는 내가 레드 레이크에서 목격한 바이다. 고향에 돌아가면 이 마을이 나를 지지한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심지어 옛날 학교친구들이 내게 다가와 여러 해 전 놀렸던 것을 사과하기도 했다. 이는 불명예를 씻어주는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참가했던 올림픽은 러시아 소치 동계 올림픽이었다. 나는 레드 레이크가 나를 전력을 다해 응원하는 것을 느꼈다. 동네 가게들은 창문에 응원 문구를 내걸었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메건 두하멜과 나의 연기를 교실에서 시청했다. 

소치 올림픽 이후 고향에 돌아왔던 것은 절대 잊지 못할 기억이다. 학교에서 강연하고, 경기 당시 모두들 어디에 있었는지, 올림픽에서 우리를 보며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들으니 마음이 무척이나 따뜻해졌다.

ⓒPaul Gilham via Getty Images

고향의 프라이드

다음 4년 동안 기념비적인 일들이 일어났다. 메건과 나는 시즌 내내 한 번도 지지 않았고, 나는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했다. 우리는 월드 챔피언십에서 두 번 연속 승리했고 우리 삶의 멋진 순간들을 기념했다.

올해 2월 평창 올림픽 기간에 부모님은 언제나 레드 레이크의 모두가 우리를 응원하고 행운을 빌고 있다고 알려주셨다. 우리의 마지막 출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나은 결과를 바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팀이벤트 금메달, 페어 동메달을 수상했다.

그러나 레드 레이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영예가 있었다. 몇 달 뒤, 레드 레이크는 내가 자란 거리에 에릭 래드포드 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드 레이크의 두 번째 프라이드 이벤트에도 참가했다.

내가 레드 레이크를 떠났던 십대 시절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나의 이야기를 돌아보고 그동안의 변화들을 보면, 내가 고향에서 응원 받고 게이 남성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생각해 보면 미소를 짓게 된다.

나는 언제나 소도시 사람일 것이다. 레드 레이크는 늘 내 고향일 것이다.

 * 허핑턴포스트US의 포스팅을 번역,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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