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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허수경이 독일에서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

향년 54.

ⓒHanicokr

독일에 살던 허수경 시인이 3일 저녁(한국 시각)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54.

허수경 시인은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등단 이듬해 낸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는 충격 그 자체였다.

“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허수경의 시 ‘폐병쟁이 내 사내’ 부분)

나이답지 않게 무르익다 못해 물러터질 듯 농염하고 청승맞은 세계는 전통 서정에 실천적 역사의식을 덧입힘으로써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 이 시집 속의 여성 주체는 발문을 쓴 송기원이 표현한바 “선술집 주모”처럼 뭇 사내들의 아픔과 슬픔을 너른 품으로 감싸 안고 다독여서는 다시금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을 불어넣어 준다.

1992년에 낸 두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은 첫 시집의 세계를 이어받으면서도 좀 더 도회적이고 현대적인 변용을 보인다. 이 시집 표제작에서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같은 구절이 첫 시집의 연장이라면,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에서 웃음으로 울음을 대신하는 의성어 ‘킥킥’은 한국 시사(詩史)에 인상적으로 등재되었다.

ⓒHanicokr

20대에 내놓은 두 시집으로 일약 한국 시의 중심으로 진입한 허수경 시인은 그러나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돌연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시인치고도 유난히 한국어의 어감과 가락에 예민했던 그가 모국어를 찾아 곧 돌아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독일에서 고고학을 전공해 학위를 받았으며 내처 현지인과 결혼해 그곳에 눌러앉았다. 공부하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시는 잊은 듯했다.

대신 동화와 소설, 산문 등으로 한국어와 글쓰기의 갈증을 풀던 그는 2001년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펴내며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오랜 외국 생활 그리고 자신의 전공인 고고학적 사유가 결합해 유목적이며 문명사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인 것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극심해진 전쟁과 테러, 그에 따른 이산과 난민 사태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어진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2005),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2011),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2016)를 거치며 심화 발전되어 한국 시가 국제적 감각과 맥락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허수경의 시 ‘물 좀 가져다주어요’ 부분)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허수경의 시 ‘빙하기의 역’ 부분)

허수경이 독일에 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하루는 서울의 한 문학 동료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다: “어이, 여기 ‘탑골’(탑골공원 근처 문인들의 단골 술집)이야. 한잔하러 나오지.” 전화를 건 동료인즉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가 보고 싶다는 뜻을 담아 악의 없는 농담을 건넨 것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허수경은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고 썼다.

2003년에 낸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에 나오는 얘기다. 탑골도 없어진 지 오래고, 허수경은 독일보다 더 먼 곳으로 떠나버린 지금, 이제 누가 그런 농담을 사이에 두고 웃고 또 울 것인가. 허수경이 갔다. 먼 집으로.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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