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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에 대한 성찰

ⓒhuffpost

아버지가 처음으로 닭 잡은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배운 대로 몸통을 땅에 누이고 날갯죽지를 한 발로 눌러 고정한 채 목을 단박에 꺾었다. 잠든 듯이 눈을 감았던 닭은 손아귀 힘을 풀자 잽싸게 일어나 달아났다. 이번엔 젖은 수건을 쥐어짜듯이 목을 두 바퀴 비틀었다. 머리를 늘어뜨린 동물은 아직도 비틀비틀 도망치고 있었다.

자신감을 잃은 아버지는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닭을 그대로 던져 넣었다. 닭은 하반신이 벌겋게 익은 채 날갯짓으로 뛰쳐나왔고 땅바닥에 누워 퍼덕였다. 만신창이가 된 생명을 주방에서 가져온 식칼로 내리쳐 끝을 냈다. 아버지는 사람 몸을 헤집는 의사이면서도 오랫동안 육식을 포기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닭을 먹지 않는다. 닭 잡는 날마다 듣던 단말마 비명 소리, 식사가 끝난 뒤 비어 있는 철장의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서 어릴 때부터 닭 냄새가 싫다고 징징거렸다. 언제부터인가 닭요리 냄새를 맡으면 정말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 취향 탓에 어려서부터 식탁에는 주로 해산물이 올랐다. 반면 나는 생선을 싫어했다. 몸을 틀어 접시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척추뼈의 생동감, 똬리 튼 내장기관의 고약한 형태, 체취처럼 고유한 비린내… 마지막 순간을 담은 채로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가 먹지 않는다면, 나도 죽지 않을 수 있었어.

반면 직육면체 모양으로 예쁘게 해체된 육류는 카스텔라처럼 아무런 생명의 감각을 환기하지 않았다. 지방이 섬세하게 각인된 최고급 소고기의 육질을 보고 있으면 심지어 관념적인 여유마저 생기는 것 같았다. 햇살이 기어드는 오후 두 시의 커피숍 테라스,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을 읽으며 우아하게 곁들이는 커피 위의 크림 아트처럼.

공장식 축산에 대해서 말하기는 매우 난감하다. 여전히 내가 육식을 하기 때문이다. 그 비참한 축산 환경은 소비자들이 생명의 복잡한 과정과 살생의 불편함을 산업에 용역 준 결과다. 죽은 몸뚱이에서 삶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때에 식욕의 한계효용은 사라졌고, 인류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육식동물이 되었다. 그 소비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축생과 살생은 공장이 맡아야만 했던 것이다. 소비의 변화 없이 산업은 바뀌지 않는다.

고 황현산 선생은 <소금과 죽음>에서 이렇게 썼다.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은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 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유전적으로 단일화된 품종 동물이 비정상적으로 밀집된 축산공장은 그 자체로 잔혹한 생존 환경일 뿐만 아니라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세균과 바이러스의 진화실험실이다. 그래서 인간이 많이 먹는 동물일수록 혹독하게 전염병에 시달린다. 계절이 서늘해질 때마다 창궐하는 전염병 탓에 수백만 마리의 닭, 돼지, 소를 으슥한 골짜기에 매장하는 일은 이제 지구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날이 풀리면 동물원은 생명을 견학하는 학생들로 북적이고, 철장을 탈출한 동물을 기다리는 또다른 방식의 죽음은 역시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동물원 대신 도살장을 의무적으로 견학하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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