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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에서 거대한 거짓말까지

ⓒNBC via Getty Images
ⓒhuffpost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트럼프를 비판하는 이들은 모두 가짜뉴스에 집착한다. 트럼프는 거짓말 때문에 비판을 받곤 하지만, 그 또한 다른 이들이 가짜뉴스를 퍼뜨린다고 비난한다.

가짜뉴스 논쟁에서 트럼프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다음 세 가지가 결합해 “진실의 죽음”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종교적·민족적 근본주의의 부상이다. 이 근본주의자들은 합리적인 토론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는 데 유리하기만 하다면 가차 없이 데이터를 조작한다. 이를테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예수에 대해 조작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반면,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좌파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약자에 대해 부정적인 뉴스가 나오면 이를 감추려 들거나 그런 뉴스를 내보내는 매체를 “이슬람 혐오적인 인종주의”라고 비난한다.

둘째는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이다. 새로운 미디어가 생기면서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로 정의되는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그 성원들은 통합된 공론장 바깥에서 뉴스와 의견을 교환한다. 또 그곳에서는 온갖 음모와 주장이 아무 제약도 없이 마구 떠돌아다닌다. 이는 네오나치나 반유대주의 웹사이트가 번성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지막은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의 유산이다. 이 위치에 있는 이들은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모든 진실은 특정한 지평에 기대어 있을 뿐 아니라, 권력관계에 기반한 주관적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우리가 역사적 제약에서 한 발짝 벗어나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 자체가 거대한 이데올로기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팩트, 사실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의견의 자유’와 ‘사실의 자유’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진실에 대한 특권적 위치를 쉽게 점유하면서 대안 우파와 급진 좌파 모두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안적 사실”이라는 것이 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다’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그런데 데이비드 어빙 등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데이터를 검증하는 데서 엄격한 실증적 방법론을 따른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 중에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데이터”라는 것은 방대하고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이해의 지평에서 데이터에 접근하며, 어떤 데이터는 특권화하고 어떤 데이터는 누락된다. 우리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역사는 선별된 데이터를 엮어 일관된 서사로 만든 ‘이야기’지, 실제 일어난 일을 사진처럼 재현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느 반유대주의 역사가가 1920년대 독일에서 유대인이 맡았던 사회적 역할을 기술한다고 치자. 그는 당시 독일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변호사·언론인 등 전문직을 거의 싹쓸이했다고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로는 사실에 가까울 수 있지만, 이는 거짓된 주장을 하기 위해 동원되는 사실이다

가장 효과적인 거짓말은 진실을 가지고 하는 거짓말, 그러니까 사실을 재가공한 거짓말이다. 한 국가의 역사를 서술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역사는 정치적 측면, 경제발전, 이념투쟁, 사람들의 고통이나 대중봉기 등 여러 관점에서 서술할 수 있다. 이 각각의 접근방식은 사실관계에서 모두 정확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같은 정도로 “진실”인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특정한 관점에서 기술되며 특정한 이해관계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사실 자체는 “상대주의”와 무관하다. 여기서 어려운 점은 이해관계와 얽혀 있는 관점들이 모두 같은 수준으로 진실하지는 않으며, 어떤 관점은 다른 관점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는 점을 보이는 일이다. 이를테면 나치 독일의 역사를 나치 치하에서 박해받은 이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역사가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이해관계에서 쓰일 때, 이는 그저 또다른 주관적 관점 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다. 이러한 역사 다시 쓰기는 내재적으로 “진실”에 더 가까운데, 이러한 역사 서술은 나치즘을 싹트게 한 사회적 총체성의 동학을 더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주관적 이해관계”가 동일한 것은 아닌데, 이는 어떤 이해관계가 다른 이해관계보다 더 윤리적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주관적 이해관계” 자체가 사회적 총체성 바깥에서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관적 이해관계”는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참가자가 사회과정에 참여하여 만드는 사회적 총체성의 국면이다. 하버마스가 초기에 쓴 걸작 <인식과 관심>(Knowledge and Human Interests)의 제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시대에 실제적일 것이다.

그런데 “진실의 죽음”을 주장하는 이들의 기본 전제에는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들은 과거, 가령 1980년대까지는 조작과 왜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진실이 존재했는데, 상대적으로 최근에 와서야 “진실의 죽음”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를 잠깐만 되돌아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동안 있었던 인권유린과 인도주의적 참사 중에 말해지지 않고 그대로 묻힌 사건이 얼마나 많을까. 베트남 전쟁부터 이라크 침공까지, 닉슨, 레이건, 부시 시대가 어땠는지 떠올려보라. 그때가 “진실”에 더 가까운 시대였던 것은 아니다. 이전 시대가 지금과 달랐던 것은 그때는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여러 국지적 “진실들”이 아수라장을 이루는 대신 하나의 “진실”(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거대한 거짓)이 우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서구에서 이 진실은 경우에 따라 좀더 좌파적일 때도 있었고 좀더 우파적일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진실’이었다.

반면, 지금 우리는 포퓰리즘의 물결로 기존 정치제도가 불안정해지는 와중에, 이 제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떠받들던 ‘진실 대 거짓’이라는 구도가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보고 있다. 이러한 붕괴가 일어나는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주의 때문이 아니라, 지배체제가 이제는 이전처럼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진실의 죽음”을 탄식하는 이들이 정말로 무엇을 개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대한 ‘이야기’,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안정성을 지탱해주던 이야기의 소멸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상대주의”를 비난하는 이들은 실은 하나의 거대한 진실이, 설령 그것이 거대한 진실이 아니라 거대한 거짓이라 할지라도 모든 이들에게 인식론적 지도를 제공해주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진실의 죽음”을 탄식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죽음과 관련된 가장 진정하고도 근본적인 행위자인 것이다.

그들이 격언으로 삼고 있을 괴테의 말 “무질서한 상태보다는 정의롭지 않은 상태가 낫다”를 다시 쓰자면, ‘여러 거짓과 진실들이 섞여 있는 현실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이 낫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는 이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우리는 보편적 해방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관점에서 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 

번역 · 김박수연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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