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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연예인에겐 바로 지금 여기가 지옥이다

  • 이승한
  • 입력 2018.09.23 14:20
  • 수정 2018.09.23 14:49
오는 11월 방송 예정인 '국경 없는 포차'의 해외 촬영 숙소에서 불법촬영 카메라가 발견됐다. 
오는 11월 방송 예정인 '국경 없는 포차'의 해외 촬영 숙소에서 불법촬영 카메라가 발견됐다.  ⓒ올리브

프랑스 파리와 덴마크 코펜하겐에 한국식 포장마차를 열고 현지인들과 소통한다는 내용을 담은 <올리브>의 새 예능 <국경 없는 포차>의 촬영 막바지, 배우 신세경은 자신의 숙소에서 이상한 물건을 발견한다. 보조배터리로 위장한 물건의 정체는 흔히 ‘몰카’라 불리는 불법촬영 카메라였다. 올리브가 고용한 외주업체 소속 카메라 스태프 ㄱ씨가 몰래 설치한 불법촬영 카메라는 불행 중 다행으로 설치한 지 한시간 만에 신세경의 눈에 띄어 적발되었다. 가수 윤보미와 함께 사용하는 숙소, 신세경이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경찰은 스태프 ㄱ씨의 죄질이 나쁘다며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등 강경대응에 나섰지만, 그렇다고 딱히 안도감이 드는 건 아니다. 신세경이 카메라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ㄱ씨의 범행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적발된 것이 처음인 것뿐이라면? 이런 일을 저지른 스태프가 ㄱ씨 하나가 아니라면? 물론 누군가는 이런 걱정이 기우일 뿐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스태프가 설치한 몰카

최근 SBS의 <생활의 달인> 제작진은 불법촬영 카메라 적발의 달인을 섭외해 자신들이 숨겨둔 카메라를 찾아보라고 주문했다가 화들짝 놀랐다. 달인이 현장에서 테이크아웃용 커피잔으로 위장한 초소형 카메라를 발견했는데, 그건 제작진이 현장을 세팅하기 전부터 그 자리에 놓여 있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불법촬영 카메라와 관련된 방송을 준비하던 촬영 스태프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만큼 작고 교묘하게 위장된 불법촬영 카메라가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데, 걱정을 안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국경 없는 포차> 사건보다 화제가 덜 되었을 뿐 이미 그 기우가 현실이 된 사례도 있다. 지난 8월 말, 걸그룹 레이샤의 멤버들은 멤버들의 사생활이 찍힌 불법촬영물을 홍보하는 온라인 사이트 캡처 사진을 자신들의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피해를 호소했다. 과거 한 웹 예능 프로그램 제작팀이 “멤버들의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라 말하며 멤버들의 숙소와 자동차에 카메라를 설치했는데, 그 과정에서 제작 스태프들이 멤버들이나 회사와는 사전에 논의한 적 없는 위치에 선정적인 각도로 카메라를 은닉해두고는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신체 위주로 불법촬영한 영상을 악의적으로 유포했다는 것이다. 해당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한 매거진 <젖은잡지>의 편집장 정두리씨 또한 피해 사실을 고발했다. 계약 당시에는 MBC의 <나 혼자 산다>와 유사한 포맷으로 각 분야에서 일하는 싱글들의 일상을 다루겠다던 기획안이, 방송이 공개될 시점이 되자 갑자기 자신이 동의한 적 없었던 19금 콘텐츠로 돌변해서 방영되었다는 것이다. 

출연자와 스태프는 상호 신뢰 관계 속에서 의지해야 하는 현장의 동료다. 그런데 스태프를 신뢰할 수 없으면 대체 출연자는 누구를 믿고 방송을 하라는 말인가? <국경 없는 포차> 사건을 보자. 자신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검증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제작사 쪽은 “외부업체 직원 한명의 개인 일탈에 의한 위법”(올리브 채널)이라며 자사가 져야 할 도의적 책임을 슬그머니 피해간다. 레이샤 사건을 보자. 제작진은 출연자에게 “평범한 일상”을 찍어 방영하겠다고 안심시켜놓고는, 몰래 설치해둔 불법촬영 카메라로 찍은 선정적인 영상을 웹 시장에서 유통하고 있다. 여성 연예인들의 노동환경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태롭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언론의 잘못도 작지 않다. <국경 없는 포차>의 경우 사건의 심각성이 크다 보니 조심스레 접근하는 언론도 예전에 비해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많은 언론은 2차 가해에 가까운 태도로 사건을 전했다. 카메라가 일찍 발견되었다는 점을 들어 이 사건을 ‘소동’이라고 서술한 언론이 있었는가 하면, 스태프가 출연자를 불법촬영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문제임에도 굳이 ‘문제가 될’ 불법촬영 영상물이 안 남았다는 점을 제목에서 강조한 언론이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군소 언론사들이 낸 기사가 아니다. 두 기사는 창간 64주년을 맞은 <한국일보>(신세경 윤보미, 해외 촬영 중 ‘몰카’ 소동. 9월18일)와 국가기간 뉴스통신사 <연합뉴스>(방송스태프가 유명연예인 해외숙소에 몰카…“문제될 영상 없어”. 9월18일)에서 낸 기사다.

 한국일보와 연합뉴스처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매체들도 이런데 다른 매체들은 어떨까? <마이데일리>는 “호기심에 그랬다”는 피의자의 주장을 고스란히 제목에 인용했고(‘국경 없는 포차’ 신세경·윤보미, 몰카 피해 파장…해당 스태프 “호기심에”. 9월18일), ‘입법국정 전문지’를 표방하는 <머니투데이> 계열 언론 ‘더 리더’는 피의자의 범죄사실을 ‘순간의 일탈’이라 묘사하며 마치 평소에는 건실했던 사람이 순간의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는 투의 제목을 뽑았다(신세경 윤보미 불법촬영 男, 순간의 ‘일탈’로 맞은 최후. 9월19일). 아예 작정하고 클릭 수 장사에 뛰어든 매체도 있다. 촬영 영상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넥스트데일리>는 “불법촬영 내용 보니… ‘경악’”이라는 제목으로 클릭을 유도했고(신세경 윤보미 불법촬영 내용 보니…‘경악’. 9월19일), <아시아투데이>는 신세경이 한달도 더 전에 인스타그램에 올린 셀카 사진을 새삼스레 소개하며 말미에 “‘국경 없는 포차’ 측은 신세경과 윤보미의 몰카 피해 사실을 전해 화제를 모았다”는 문장을 덧붙였다(‘국경 없는 포차’ 신세경, 볼륨감 넘치는 몸매 인증샷 ‘군살 제로’. 9월19일). ‘볼륨감 넘치는 몸매’ 따위의 키워드로 해당 사건을 검색한 이들을 낚으려 든 것이다. 

누구를 믿어야 하나

스태프도 믿을 수 없고, 언론도 가해에 동참한다. 그렇다면 공권력은 어떨까? 역시 <국경 없는 포차> 사건보다 좀 덜 알려졌을 뿐 사태의 심각성은 그에 못지않은 단역배우 김주한 스토킹 사건을 보자. 드라마 <태양의 후예> <비밀의 숲> 등에 출연한 배우 배효원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단역배우 김주한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2016년 영화 <로마의 휴일> 촬영 현장에서 사진 한번 찍은 인연을 빌미로 김주한은 올 초부터 마치 두 사람이 연인인 것처럼 글을 올리는가 하면, 밤늦은 시간 일방적으로 전화와 문자를 보내고 배효원의 주변 사람들에게 두 사람이 열애 중인 것처럼 헛소문을 퍼뜨렸다. 참다못한 배효원은 7월께 서울 성동구 사이버수사대를 찾아가 공권력의 도움을 청했는데, 사이버수사대가 했다는 말이 장관이다. “연기자니까 팬심으로 보라.” “정신적으로 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무시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심지어 경찰은 공적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한 배효원에게 자력구제를 권하기에 이른다. “너무 스트레스 받으면 함께 영화 찍었던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연락해서 저 사람을 컨트롤해보라.”(이상 배효원 인스타그램 게시물 중)

함께 일하는 동료도, 언론도, 심지어 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권력도 여성 연예인이 안심하고 노동할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연예인들이, 여성으로 살아가며 경험하는 온갖 부조리와 불안을 근심하고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그런데 이 당연한 일 앞에서 남성 소비자들은 격분한다. 조남주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에 어떤 이는 “이제 한국에서 남자들은 어떻게 살라고 이러느냐”는 댓글을 남기고, 어떤 이들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82년생 김지영>의 영화 제작을 막아달라”는 청원을 올린다. 주연을 맡기로 한 배우 정유미의 인스타그램에는 흥분한 남자들이 남기고 간 욕설과 원색적인 비난이 빼곡하다. 현장의 동료도, 언론도, 공권력과 동료 시민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니, 젊은 여성 연예인에겐 바로 지금 여기가 지옥이 아닌가.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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