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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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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가장 좋아했던 만화책 중 하나는 리우스의 만화였다. 한국에서 좀 알려진 책은 지금은 절판된 김영사의 <마르크스>밖에 없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 출판사 ‘오월’이 펴낸 리우스의 만화책들을 대학가 서점에서 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나온 책이 김영사에서 다시 출간된 <마르크스>였고, <모택동> <쿠바혁명과 카스트로>, 마지막으로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였다.

본명이 에두아르도 움베르토 델리오 가르시아인 리우스는 멕시코 출신이자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정치만화가다. 그냥 정치만화가가 아니라 매우 급진적인 좌파다. 그의 만화는 간략한 그림체와 배배 꼬인 풍자, 한 권만 읽어도 해당 역사가 완벽히 이해되는 놀라운 요약력의 승리다. 대학 초년생의 내가 무엇보다 좋아했던 책은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였다.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게릴라 혁명군의 이야기는 가슴을 활활 불타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리우스의 만화 '마르크스' 책 표지
리우스의 만화 '마르크스' 책 표지

혁명이 낳은 골치 아픈 독재자

20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니카라과는 반세기 넘게 소모사 가문이 통치했다. 지금 집권 중인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가 소속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은 1960~70년대 반정부 민주화운동을 펼쳤다. 그냥 시위만 하는 운동이 아니라 병력을 갖춘 반군이었다. 미국은 안 그래도 좌파혁명의 본루인 남미에서 니카라과마저 민주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소모사는 미군의 지원을 받아 산디니스타를 와해하려 했다. 그러나 1년에 가까운 혁명전쟁 이후 1979년 소모사 가족은 국외로 망명을 간다. 산디니스타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썩는다. 산디니스타의 가장 중요한 아이콘 중 한 명이던 오르테가는 1984년부터 90년까지 니카라과 대통령이 됐다.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우파 반군 ‘콘트라’와의 투쟁에서도 이겼다. 그러나 그는 지금 남미의 가장 골치 아픈 독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재집권 뒤 종신 집권을 노렸다. 공산주의자 출신이지만 종교계와 급격하게 친해지면서 낙태금지법에도 찬성했다. 주요 대기업으로부터는 많은 돈을 챙겨 먹었다. 심지어 대통령선거 러닝메이트로 부인을 지명했다. 그는 정권을 영원히 연장시키려 한다. 지난 4월 오르테가 정부는 시민들을 죽였다. 연금개혁을 감행했다가 전국적 시위가 벌어졌다. 오르테가는 시위를 보도하는 TV 방송을 막고 60여 명의 사망자가 나올 정도의 경찰폭력을 휘둘렀다.

사람들은 지금 한국의 정부를 ‘촛불 정부’라고 한다. 하지만 ‘386 민주화 혁명 정부’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할지 모르겠다. 그들 세대는 투쟁했고, 승리했다. 한국의 민주화가 앞당겨진 것은 그 세대가 충분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사실이다. 그러니 당연하고도 필연적으로 한국의 모든 세대는 그 세대에 바라는 게 있다. 유일하게 썩지 않는 혁명 권력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촛불 정부’의 20년 뒤

이해찬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선거 내내 개혁 진영이 성과를 내려면 최소 20년 집권이 필요하다고 포효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20년 뒤 어떤 한국을 보게 될까. 그 혁명 역시 필연적으로 썩게 될까.

나는 얼마 전 리우스의 책을 다시 읽었다. 거기에는 민주화와 혁명을 향한, 마침내 제국주의에 맞서 새 시대를 열어젖혔다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리우스는 2017년 죽었다. 죽기 전 산디니스타 출신 오르테가 정부의 시민 학살을 본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나는 그가 좀더 오래 살아서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의 속편을 내주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건 그저 정권을 바꾸는 혁명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냉철한 후일담에 가까울 것이다.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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