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허경호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20일 유해용 변호사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례적으로 3600여자 분량으로 장문의 사유를 제시했다. 통상 법원은 기각 사유로 한두 문장만 내놓는다.
유 변호사는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을 지냈다. 퇴임하면서 대법원의 재판서류 수만 건을 들고 나왔고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이를 파기했다.
검찰은 18일 여러 혐의를 적용해 그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해 청구된 첫 구속영장이었다.
유 변호사는 2016년 초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의료진’ 김영재 원장 측의 특허소송 관련 정보를 불법으로 수집해 법원행정처를 통해 청와대에 전달한 혐의를 받았다. 대법원 근무 중 취급한 사건을 변호사 개업 후 수임하기도 했다.
검찰은 구속영장에 공무상비밀누설, 직권남용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절도, 변호사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었다.
한겨레에 따르면 법원은 검찰이 유 변호사에게 적용한 혐의에 대해 조목조목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2016년 재판연구관을 시켜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 박채윤씨 대법원 사건 진행 상황과 향후 심리방향 등을 담은 문건을 작성하게 하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혐의(공무상 비밀누설)에 대해 해당 문건이 ‘공무상 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허 판사는 “처리절차 등 일반적 사항 외에 구체적 검토보고 내용과 같이 비밀유지가 필요한 사항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유 변호사가 2014~16년 재판연구관실 업무를 총괄하는 수석·선임재판연구관으로 있으며 확보한 재판 관련 문건 등 수만 건을 지난 1월 퇴직 시 유출했다는 혐의(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도 인정하지 않았다. 허 판사는 해당 문건이 (공공기록물에 해당하는) ‘전자기록물 원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 해당 문건을 확보할 당시 ‘개인적 목적’에 사용할 의도가 없었다고도 덧붙였다.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을 출력물 형태로 반출한 혐의(절도)에 대해서는 “유 변호사에게 절취의 의도가 없었고, 대법원의 ‘추정적 승낙’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해당 문건을 모두 없애버린 부분에 대해서도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법원 판단에 따라 파기했다”는 유 변호사 진술을 받아들여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재판연구관 보고서에 포함된 개인정보를 유출했다는 혐의 역시 “문건에는 당사자의 성명 외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범죄의 성립 여부에 의문이 있다”고 봤다.
대법원 근무 당시 취급한 행정소송을 퇴임 뒤 수임했다는 혐의(변호사법 위반)에 대해서는 “법리상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죄가 안 된다’고 단정한 다른 혐의와 달리 혐의가 일부 소명됐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미 증거가 수집돼 있다”, “법정형(최대 징역 1년)에 비춰 구속의 사유나 필요성 등이 인정되지 않는다” 등 이유로 ‘구속 사유’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반발했다. ‘기각을 위한 기각사유’라는 게 항변 요지다.
검찰은 “그간 영장판사는 재판 관련 자료에 대해 ‘재판의 본질’이므로 압수수색조차 할 수 없는 기밀 자료라고 하면서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해 왔는데, 오늘은 똑같은 재판 관련 자료를 두고 비밀이 아니니 빼내도 죄가 안 된다고 하면서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모순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