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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자존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Vizerskaya via Getty Images
ⓒhuffpost

10년 넘게 기분부전장애(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와 불안장애를 겪으며 정신과를 전전했던 저자와 정신과 전문의와의 12주간의 대화를 엮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이 책의 일부가 매주 화요일 오후에 업데이트된다.

나는 절절맨다. 절절맨다는 표현이 딱 맞다. 마음은 이미 절절매고 있는데, 머리는 절절매기 싫어서 사나운 동물처럼 쏘아붙인다. 서로 다른 감정이 한 몸에서 나오자 존재가 어그러진다. 그렇게 온 얼굴과 귀 끝까지 붉어진 상태로 상대를 마주하
고 난 후의 버릇은 거울을 보는 일이다. 혼자만의 전쟁을 치른 직후 바라보는 얼굴은 남루하다. 빨갛고 초점 없는 눈, 잔뜩 흐트러진 앞머리,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는 짙고 흐린 표정. 불투명한 존재 같다. 바닥까지 추락하는 감정을 느끼고, 애써 부여잡아온 정신의 균형이 다시금 무너진다.

선생님 어떻게 지내셨어요?

잘 지내다가 목요일과 금요일에 조금 안 좋았다가, 다시 괜찮아졌어요.

선생님 조금 안 좋았다는 건,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저번에 친구 이야기 했었잖아요. 제가 불안감을 보이는 게 상대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하셨고요. 이걸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는 잘 되지 않아요. 술 마시면 본심이 나올 때가 있잖아요. 목요일에 그 친구랑 맥주를 마시면서 대학교 마지막 학기 때 친했던 친구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제 불안감을 또 이야기한 거예요. 전에도 했던 얘기인데……, 그게 너무 후회됐어요.

선생님 친구의 반응은요?

그냥 ‘그렇구나’ 이런 반응?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하니까요. 그것 때문에 새벽에 엄청 우울하고 후회됐다가, 금요일에는 또 금방 괜찮아졌어요. 제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상대가 저를 만만하게 볼 거 같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저는 언니한테 의지하고 언니의 챙김을 받던 입장이었거든요. 늘 친구 관계나 연인 관계에서 내가 상대를 지켜주거나 도와주기보다는 받는 쪽이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한테는 처음으로 ‘뭐든 다 해주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 본인 모습이 보이던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좀 달라요. 걔는 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요. 저는 자기 표현을 잘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 느낌, 내 감정을 언어로 잘 정리해서 전달하는 편인데, 걔는 잘 못해요. 자기도 잘 못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감정을 억제하는 스타일이라서 걱정됐어요. 이건 제가 책에서 본 건데, ‘감정에도 통로가 있어서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해서 자꾸 닫아두고 억제하면 긍정적인 감정까지 나오지 못하게 된다, 감정의 통로가 막힌다’라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저는 이 글이 정말 공감됐거든요? 그래서 친구한테도 말해줬어요. 그런데 그 후부터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인데도 카톡을 몇십 개씩 보내서 좀 귀찮았어요.

선생님 귀찮았어요?

네.

선생님 지난주까지만 해도 안 그랬잖아요.

네. ‘내가 잘해주니까 이제 만만한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래서 목요일에 더 힘들었던 거 같아요. 금요일에 왜 괜찮아졌냐면, 제가 왜곡된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자!’ 하고 되짚어보니 그 친구는 원래 그런 성격인 거예요. ‘원래 상냥한 스타일이 아니고 내가 편하고 친해서 그러는 거지 내가 만만해서 그런 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두 번째에는 ‘얘가 나를 만만하면 보면 어떻고, 우습게 보면 또 어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대학교 때 친구 이야기를 해서 괴로웠던 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목요일에는 그 이야기를 한 걸 엄청 후회하고, 나는 왜 이렇게 사람을 질리게 만들까 자책했어요. 그런데 다음 날 그 친구가 아무렇지도 않아서 안심했어요. 만약 저를 소홀하게 대했다면 ‘그 이야기 때문이야’라고 믿었을 거 같아요.

선생님 중간이 없네요.

늘 극단이죠. 백극단.

선생님 질려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스스로 질리고 있네요?

네. 이런 이중적인 감정이 이상해서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저번에 얘기했던 ‘간택 받았다’는 게 제 책임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때는 인정 안 했는데 맞는 거 같아요. ‘얘가 나를 선택했으니까, 나한테 마음을 열어주었으니까, 나는 더 잘해줘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 계급사회가 아닌 이상 누가 누군가를 뽑고 이럴 권리는 없어요. 그냥 상호작용이죠. 연애할 때도 내가 우위에 섰다가 불리해졌다가 이렇게 왔다 갔다 하잖아요?

네. 그게 싫으니까 최종적으로 나를 가장 많이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선생님 친구에게 빈틈이 보이니까 약간의 우월한 감정이 생기는 거죠. 거꾸로 친구의 태도가 별로였다고 해도 다른 이유가 있으려니 할 수도 있는 건데, 극단적으
로 끝과 끝만 생각하네요.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할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둘 다 공존할 수도 있는데, 모든 것들을 극단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이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내 태도도 달라지게 돼요. 내가 받은 만큼만 주는 걸로. 그게 스스로를 힘들게 할 거고요.

아, 맞아요. ‘나는 진심인데 얘는 그냥 외로우니까 나한테 기대는 거 아닐까?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이 드니까 ‘아 그럼 싫어!’라는 감정이 바로 떠올랐고요.

선생님 그 불안감이 상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어요.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느낄 수도 있거든요. 무의식적으로요. 마치 자석 같을 수 있어요. 가까이 가면 더 멀어지고, 멀어지려고 하면 가까워지는. 그냥 그 관계 자체에 더 이상 무리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역으로 생각하면 사실 귀찮다고 하면서도 관심을 즐겼을 수도 있어요.

맞아요. 귀찮으면서 즐겨요. 변태 아니야 진짜?

선생님 뭐가 또 변태예요. 누구나 다 그렇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괜찮아요?

선생님 네.

저는 되게 작은 집에서 살았거든요? 요새는 아파트 베란다만 봐도 평수를 대충 알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게 창피했어요. 그런데 창피해하는 내가 더 창피한 거예요. 그래서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애인과 친구들한테 더 당당한 척 말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언니랑 동생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왜 거짓말을 해?” 하면 “뭐 여기나 거기나 비슷하잖아? 굳이 알려줄 필요 없잖아”라고 별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는 거예요. 저는 죄책감이 드는데요.

선생님 그럴 수 있죠. 자신이 편하다면요.

아…….

선생님 너무 강박적으로 이상화된 잣대를 계속 가져와서,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거죠. 자신을 벌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저 나아지고 있나요? 전문가 입장에서요.

선생님 괜찮은데요?

저는 좋아지고 있다고 느껴요. 회사에서도 편해요.

선생님 다른 것보다 귀찮은 친구가 생겼잖아요. 친구의 반응이 귀찮다고 했잖아요.

저 자주 귀찮아해요. 그게 누구든. 그냥 ‘얘가 나를 싫어하면 어쩔 거야, 귀찮으면 어쩔 거야’ 같은 마음으로 관계를 맺는 게 좋아요?

선생님 과연 어떤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싫어해서’, ‘나를 좋아해서’를 대표할까요? 친구의 행동도 친구가 싫다기보다 그 친구의 행동이 싫었던 거잖아요. 지금은 상대의 어떤 행동 하나하나를 ‘거절’로 해석해서 받아들이고 있어요.

늘 그래요. 반응 하나에도 ‘이제 내가 싫은가 봐’라고 생각하는 거요.

선생님 충분히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있는데도 가장 극단적인 생각을 하죠. 그 생각의 기준이 상대에게도 적용되고요. 내 생각이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거예요.

네. 자꾸 극단적인 생각에 휘말리니까 좀 건강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 누굴 만나든 절대적인 선은 없거든요. 불만도 있을 수 있고요. 늘 부분과 전체를 구분했으면 좋겠어요. 하나가 마음에 든다고 이 사람 전체가 다 마음에 들고, 하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전체가 싫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좀 다르게 생각하는 시도를 하면 좋겠어요.

*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흔 출판사)’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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