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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림비가 된다

  • 홍은전
  • 입력 2018.09.18 11:29
  • 수정 2018.09.18 11:32
ⓒ뉴스1
ⓒhuffpost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그치는 듯하다가 다시 내리고 멈추는가 하면 다시 퍼부었다. 2014년 4월19일 밤,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은 부모들이 내 아이를 살려내라 울부짖으며 행진하던 날도 징그럽게 비가 내렸다. 동이 틀 무렵 진도대교 앞에서 가까스로 경찰들을 뛰어넘었던 순간,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팽목항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5일 만에 아들을 만났다. 이제 막 샤워한 듯 말간 아들의 얼굴을 보자 아버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목포의 한 병원에 아들을 안치했다. 시신 검안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냉동고에 아들을 넣고 나오자 바깥에는 그 자리조차 얻지 못한 이들이 줄을 서 있었다.

씻은 듯 예쁘던 아이들의 얼굴이 4월의 따뜻한 공기 속에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한 엄마가 내 아이 좀 얼려달라고 애원했다. 1시간이면 된다던 검안서는 해가 다 지도록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받아야 장례식장을 잡을 수 있었다. 다급해진 아버지가 회사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수부에 아는 사람 없어요?” 사장이 없다고 대답했다. 아버지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만날 변호사 끼고 살면서 그런 것 하나 해결 못해줍니까?” 사장이 미안하다며 울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다 썩히기 전에 휘발유를 사서 내 손으로 화장하겠다며 난동을 부렸다. 경찰 수십명이 아버지를 막고 나섰다.

장례를 치른 후에도 돌아버릴 것 같은 시간은 계속되었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눈 감고도 고칠 수 있던 기계 앞에서 수시로 정신을 놓쳤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실컷 취할 수도 없는 안산이 싫었다. 그때 아버지는 팽목항을 떠올렸다. ‘제발 내 아이가 아니기를’ 바랐던 마음이 ‘제발 내 아이가 맞기를’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을 때 부모들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약속했다. “우리, 아이들 다 찾아서 같이 갑시다.”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014년 10월, 아버지는 다시 진도로 돌아왔다. 아이를 먼저 찾았다는 죄책감에 체육관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세요?” 하고 누가 물으면 대답을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팽목항에 자리를 잡은 지 4년이 되었다.

지난 9월 초, 내가 팽목항 분향소를 찾았을 때는 진도항 항만 개발 공사로 유가족들이 떠밀리듯 울면서 영정을 안고 떠난 후였는데, 그 자리에 덩그러니 아버지가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희생자들의 기림비를 세우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지역의 활동가들은 개발 공사를 중단하고 4·16기억공원을 조성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한 언론이 “이제는 우리도 먹고살아야”라는 주술 같은 기사를 써 돌팔매를 던졌다. 주술은 실로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정권을 무너뜨리는 혁명의 와중에도 단원고 교실과 안산 분향소, 동거차도 인양 감시 초소 같은 엄청난 현장들이 하나씩 하나씩 지워졌다.

팽목항에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그날의 기억이 아버지에게 와락 달려든다. 숨을 쉴 때마다 아프지만 이 고통스러운 자리를 떠나지 않는 저 아버지가 나는 살아 있는 기림비 같다고 생각했다. 잊지 않으려고 자기 몸에 뭔가를 새기는 사람. 어떤 이는 동정하고 어떤 이는 침을 뱉어도 아버지는 비석처럼 그 자리를 지켜왔다. 아버지가 두려운 것은 모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 진실이 밝혀져 희생자들이 말간 얼굴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그 바다에 한 아버지가 남아 싸우고 있다. 등대처럼, 기림비처럼.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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