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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는 사라져도 콘텐츠는 살아야 한다

종이 잡지 '라이프'가 폐간되는 과정을 둘러싼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종이 잡지 '라이프'가 폐간되는 과정을 둘러싼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huffpost

잡지가 사라졌다. 중앙일보 계열의 제이티비시플러스는 발행하던 잡지 8개 가운데 4개를 순차적으로 폐간했다. 라이센스 잡지(외국 잡지와 판권계약을 맺고 한국판으로 발행하는 것) <엘르> <바자> <에스콰이어> <코스모폴리탄>은 남고 <헤렌>, <인스타일>, <쎄씨>, <여성중앙>이 폐간됐다. 제이티씨플러스 관계자는 <미디어오늘>에 “폐간이 아니라 휴간”이라고 말했다. “잡지 시장 경기가 좋아지고 경영 상황이 바뀌면 다시 복간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잡지 시장 경기가 좋아지면 복간을 시킨다고? 이미 잡지 시장에 겨울은 왔다. 일간지와 디지털 미디어에 겨울이 왔다면 잡지 시장에는 빙하기가 왔다. 복간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이건 폐간이나 다를 바가 없다. <쎄씨> 편집장 등 기자 여러 명은 권고사직을 요구받았다. 제이티비시플러스 직원 한 명은 사옥에 대자보를 붙였다. “‘콘텐츠 하우스’라고 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콘텐츠에 대한 일말의 존중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절규였다. 대자보는 금방 떨어져 나갔다. 소식을 전하는 매체는 몇 없었다.

<쎄씨>는 상징적인 잡지였다. 1994년 10월 창간한 이 여성 잡지는 엑스세대의 어떤 바이블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건너온 라이센스 잡지들이 폭발적으로 생겨나던 시절에도 <쎄씨>는 고고하게 시장에서 버텼다. 이곳 출신들은 다른 회사에서 중역을 맡거나 잡지사를 차리기도 했다. 그 잡지 출신들은 악명높은 일중독자에 일도 잘하기로 유명했다. <여성중앙> 역시 상징적인 잡지였다. 나는 어머니의 “<여성중앙> 하나 사 와라”라는 심부름을 매달 해야했다. 그것은 우리 어머니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 바이블이었다. 얼마전엔 다른 잡지에서 일하는 후배 하나가 메일을 보냈다. 회사 자금 사정으로 인해 원고료가 조금 늦게 들어올 수 있다는 양해와 사과의 메일이었다. “편집팀도 반은 전투 모드”라는 말이 가슴을 쳤다.

뉴요커라면 너무나도 익숙한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가 문을 닫았다. 창간 63주년 만의 일이다. 이미 1년 전에 디지털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매체를 계속 지탱할 만큼의 돈을 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발행인은 8월31일 “재정적 문제로 발행을 완전히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의 폐간 기사들과는 다른 부분을 발견했다. 그건 폐간을 하더라도 잡지의 영속성을 지키려는 시도다. <빌리지 보이스>의 마지막 직원들은 다음 세대가 계속해서 빌리지 보이스의 컨텐츠들을 볼 수 있도록 지면 전체를 아카이빙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다. <쎄씨>는? <여성중앙>은?

나는 2년 간 이라는 비(非) 라이센스 남성지의 디렉터로 일하며 많은 기사를 썼다. 잡지는 내가 퇴사하고 얼마 있지 않아 사라졌다. 누구도 아카이빙은 하지 않았다. 홈페이지는 사라졌다. 한국은 잡지를 그냥 없애버린다. 그리고 역사를 버린다. 수십년이 된 잡지의 아카이브는 인류의 유산이다. 나는 잡지의 전성기가 다시 오리라 쉬이 예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많은 정보의 아카이빙이다. 잡지는 사라질 수 있다. 물성에의 매혹은 사라질 수 있다. 콘텐츠는 남아야 한다. 그것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잡지들을 휴간시키고 폐간시키는 콘텐츠 회사들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책임이자 긍지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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