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그 첫번째 이야기

그냥 좀 우울해서요

  • 백세희
  • 입력 2018.09.11 16:46
  • 수정 2019.06.03 14:23
ⓒ흔 출판사
ⓒhuffpost

10년 넘게 기분부전장애(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와 불안장애를 겪으며 정신과를 전전했던 저자와 정신과 전문의와의 12주간의 대화를 엮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이 책의 일부가 매주 화요일 오후에 업데이트된다.

 환청이 들리고, 환상을 보고, 자해를 하는 것만이 병은 아니다. 가벼운 감기가 몸을 아프게 하듯이, 가벼운 우울도 우리의 정신을 아프게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일기를 살펴보면 긍정적인 편은 아니었고, 우울한 감정을 종종 느꼈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우울감이 심해졌는데, 그땐 공부도 안 했고, 대학도 못 갔고, 앞길이 막막했으니 당연히 우울한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변하고 싶었던 부분(다이어트, 대학, 연애, 친구)이 모두 해결된 후에도 똑같이 우울했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니고 오락가락했다.

어떤 날엔 울적하고, 어떤 날엔 행복하게 잠들었다. 스트레스 받으면 체했고, 우울할 땐 울었다. 나는 원래 이렇게 우울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며 점점 어두워져 갔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컸고, 특히 낯선 상황에서 심한 불안을 느꼈지만 안 그런 척 연기도 잘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고 자신을 더 채찍질했다. 그러다 더는 견디기가 힘들어져서 상담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긴장되고 두려웠지만 기대를 비우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선생님 어떻게 오셨나요?

그냥 뭐랄까, 좀 우울해서요. 자세히 말씀드려야 할까요?

선생님 그러면 저야 좋죠.

(휴대폰 메모장을 켜고 적어두었던 걸 말했다) 심각한 타인과의 비교, 거기서 오는 자기 학대, 그리고 자존감이 낮은 거 같아요.

선생님 요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자존감이 낮은 건 가정환경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엄마는 늘 ‘우리 집은 가난해, 가난해, 돈이 없어’를 입에 달고 살았거든요. 다섯 식구가 살기에는 집 평수가 작았는데(18평), 저희 아파트 이름이랑 똑같은 이름의 다른 아파트가 동네에 있었어요. 그 아파트는 평수가 굉장히 넓었는데, 어느 날 넓은 아파트와 좁은 아파트 중에 어디에 사냐는 친구 어머니의 질문에 당황한 이후로 집을 알려주는 게 부끄럽고 꺼려졌어요.

선생님 그 외에 기억에 남는 일은 없나요?

무수히 많죠. 말로 하면 진부하지만 아빠가 엄마를 때렸어요. 말로만 부부 싸움이지 그냥 폭력이었죠. 어릴 때를 생각하면 엄마와 우리를 때리고 집안 살림을 박살 낸 뒤 새벽에 집을 나가버리던 아빠, 울다 잠들면 아침이 오고 엉망진창인 집을 뒤로한 채 학교에 가던 우리 모습이 떠올라요.

선생님 무슨 기분이 들었나요.

뭔가 비참함? 슬픔? 우리 가족만 알아야 하는 비밀이 쌓여가는 기분이었던 거 같아요. 감춰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언니는 제게, 저는 동생에게 입단속을
시키기도 했고요. 그리고 자존감이 낮아진 건 가정사도 있지만 언니와의 관계가 컸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언니와의 관계요?

네. 언니의 사랑은 늘 조건부였어요. 제가 공부를 안 하거나 살이 찌거나, 뭔가를 열심히 하고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저를 깎아내리고 괴롭히고 모멸감을 주고는 했어요. 터울이 커서 언니 말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했고요. 경제적인 부분도 언니에게 많이 묶여 있었어요. 언니가 옷이나 신발, 가방 등을 주로 사줬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약점으로 삼기도 했어요. 언니한테 대들거나 말을 안 들으면 사줬던 걸 모두 회수해갔죠.

선생님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나요?

벗어나고 싶었어요. 잘못된 관계 같았거든요. 언니는 되게 모순적이었어요. 나는 되고 너는 안 돼, 이런 식? 자기는 외박해도 되고 너는 안 돼. 난 네 옷 입어도 되고 너는 안 돼. 이런 거. 그런데 완전 애증이었던 게, 언니가 너무 싫다가도 언니가 저한테 화를 내면서 관심을 끊으면 너무너무 두려웠어요.

선생님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해봤나요?

음, 제가 성인이 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일단 경제적인 부분부터 독립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아르바이트를 주중 주말 늘 하면서 조금씩 경제적으로 독립했죠.

선생님 정신적으로는요?

그건 정말 어려웠어요. 언니는 저 아니면 남자친구랑 노는 것만 좋아했어요. 자기 말 잘 듣고 자기 성격 잘 알아서 맞춰주니 당연히 편했겠죠. 어느 날 언니가 저랑 놀다가 “다른 사람이랑 노는 건 재미없어,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고 편해”라고 했을 때 어이가 없어서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말했어요. 나는 언니가 불편하다고, 편하지 않다고.

선생님 언니의 반응은 어땠나요?

정말 당황하고 충격받더라고요. 나중에 들어보니 며칠 동안 밤마다 울었대요. 지금도 그 이야기가 나오면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요.

선생님 언니의 그런 모습을 보니까 어땠어요?

뭔가 짠하기도 했는데, 후련했어요. 자유로워진 기분이었어요. 조금은.

선생님 언니와의 애착관계에서 벗어난 후에도 자신감이 회복되지는 않았나요?

가끔 자신감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이런 성향과 우울감은 그대로였던 것 같아요. 언니한테 의존하던 게 애인에게로 옮겨간 느낌?

선생님 연애는 어떤 식으로 하는 편인가요?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먼저 다가간다거나 하는 적극성이 있나요?

아니 전혀요. 제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상대가 저를 만만하게 볼 거라는 생각에 좋아하는 걸 잘 티 내지도 못해요. 고백하거나 꼬시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그래서 늘 수동적인 연애를 하는 편이에요.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만나보면서 그 상대에 대해 알아가다가 호감이 생기면 연인으로 이어지는 패턴?

선생님 연애를 안 할 때도 있나요?

거의 없어요. 누군가를 만나면 오래 만나는 편이고, 애인한테 굉장히 의지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애인도 저를 되게 챙겨주고요. 그런데 애인이 절 사랑해주고 다 받아주는데도, 뭔가 답답함이 생겨요. 저는 사실 의존하고 싶지 않거든요. 좀 독립적이고 자립심 있고 혼자서도 잘 살아가고 싶은데 그걸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때요?

어렸을 때는 친구관계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어요. 그 나이 또래와 다르지 않았죠. 그런데 초등학교 때 한 번, 중학교 때 한 번 왕따를 당하면서 고등학교 때까지 무리에서 낙오되는 것, 친구관계에 대한 공포감이 많이 생겼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게 자연스럽게 연애로 옮겨갔고, 친구나 우정 같은 거에는 큰 기대나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했어요.

선생님 그렇군요. 하시는 일은 만족하시나요?

네. 출판사에서 홍보마케팅 일을 하는데, 지금은 회사 SNS채널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콘텐츠를 만들고 업로드하고 노출시키고 등등. 재밌고 적성에 잘 맞는 거 같아요.

선생님 좋은 결과물이 나올 때도 있었나요?

네. 있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할 때도 있었고 뭔가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감을 느낄 때도 있고요.

선생님 그렇군요. 자세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여러 가지 검사를 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의존성향이 강해 보이네요. 감정의 양 끝은 이어져 있기에 의존성향이 강할수록 의존하고 싶지 않아 하죠. 예를 들어 애인에게 의존할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만이 쌓이고, 애인에게서 벗어나면 자율성을 획득하지만 불안감과 공허감이 쌓여요. 어떻게 보면 일에 의존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성과를 낼 때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안도할 수 있으니 의존하지만, 그 만족감 또한 오래가지 않으니 문제가 있죠. 이건 쳇바퀴 안을 달리는 것과 같아요. 우울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또 노력하고 실패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주된 정서 자체가 우울함이 된 거죠.

그렇군요(이 말에 위로받았고 명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 일탈이 필요해요. 우울과 좌절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도전해보는 게 좋아요.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지금부터 찾아봐야죠. 작은 것부터요.

그리고 SNS에 가식적인 삶을 올리게 돼요. 행복한 척하는 건 아닌데, 책이나 풍경, 글 같은 취향을 드러내면서 특별해 보이고 싶어 하는 거죠. ‘나 알고 보면 이렇게 깊이 있고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요. 그리고 제 기준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해요. 제가 뭐라고 감히 사람을 평가할까요. 너무 이상해요.

선생님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마치 로봇이 되고 싶은 사람 같아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의 사람이 되고 싶은 것처럼요.

맞아요. 불가능한데.

선생님 이번 주에는 오늘 드릴 검사지(500가지 문항의 인성검사 및 증상, 행동평가 척도검사)를 작성하고, 어떤 일탈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럴게요.

(1주일 후)

 

선생님 어떻게 지내셨어요?

현충일 전날까지는 우울했고요, 그 후에는 좋았어요. 저번에 말씀 안 드린 게 있는데, 로봇이 되고 싶은 거 같다고 하셨잖아요. 남에게 피해 주면 안 된다는, 그런 저만의 기준이 심해진 이후로 강박감이라고 해야 하나, 일상에 불편함이 생겼어요. 예를 들어 버스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전화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올라요.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요. 실제로 그러지는 못하지만요.

선생님 죄책감이 들었겠군요.

네. 한두 번 정도는 조용히 해달라고 말을 하지만 열에 여덟 번은 하지 못해요. 그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심하고요. 회사에서 들리는 키보드 소리에도 예민해져서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고, 소리가 많이 나는 동료에게 직접 이야기하기까지 했어요. 말하고 나서는 후련했고요.

선생님 시끄럽게 하는 사람한테 조용히 하라는 말을 못 했다고 누가 그렇게 괴로워할까요? 마치 ‘어떻게 해야 나를 괴롭힐 수 있을까?’의 고민 속에 있는 사람 같아요. 대부분 사람은 비겁해요. 하지만 자신이 비겁하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열 번 중에 한 번이나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자신을 비하하죠.

저는 열 번 중에 열 번을 다 이야기하고 싶어요.

선생님 그렇게 한다고 행복해질까요? 열 번이면 열 번 다 한다고 ‘다 나았어, 편해졌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 반응이 다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데도 굳이 내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거죠. 말을 해봤자 듣지 않을 거 같은 사람들은 피하는 것도 나를 위한 선택이 될 수 있어요. 근본적인 부분을 찾아서 하나하나 정리하는 건 말이 안 돼요. 내 몸은 하나인데, 너무도 큰 역할을 부여하는 거죠.

저는 왜 이러는 걸까요?

선생님 착해서?(이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억지로 길에 쓰레기를 버리고 버스에서 큰 소리로 통화해봤는데, 기분은 별로였어요. 그래도 해방감은 있었어요.

선생님 별로였다면 일부러 하지는 마세요.

사람이 입체적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 사람을 평면적으로 바라봤다면, 그 시선은 남을 바라볼 때만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볼 때도 적용되죠.

한 번쯤은 무서운 사람이 돼도 괜찮아요. 예를 들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그 사람이라도 화내지 않았을까? 그 사람이라도 다 받아주지는 않았겠지?’ 이렇게 비교한 후에 화내도 돼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날카롭다고 여길지라도요.

가지고 있는 경험과 생각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만 얻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이렇게요. 남의 생각, 남의 경험을 훔쳐 와서 말이죠.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사람은 다 입체적이에요. 겉으로는 멋져 보여도 뒤에서는 더러운 행동을 할 수도 있고, 내가 부풀려서 기대해놓고 실망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땐 오히려 ‘저 사람도 숨 쉬고 사는구나, 별수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면 나한테도 관대해질 수 있어요.

저는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약한 모습을 다 알고 있을 거 같아요. 뭔가 무섭게 말해도 내 안의 약한 모습을 알 거 같은 거예요. 구려 보일까 봐 두려운 거죠.

선생님 불안감이 숨어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무언가를 이야기했을 때, 자동으로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떠나지 않을까?’를 생각하니까 불안한 거죠. 이야기
하는 게 좋은 경험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결과가 한 방향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아야 해요. C라는 행동, D라는 행동이 나올 수 있죠. 반응은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걸 깨닫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해요.

그렇구나. 저번에 일탈을 이야기하셔서, 히피 파마를 했어요. 저도 마음에 들고 회사 사람들의 반응도 좋아서 기뻤어요. 그리고 저번에 물으셨던 거 있잖아요, 친구들이 생각하는 제 장점은 공감을 잘해준다는 거?

선생님 실제로 공감을 잘하나요?

네. 엄청요. 그래서 공감을 숨길 때도 있어요.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선생님 하지만 타인이 나를 표현하는 말에 너무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공감을 더 잘해줘야 한다고 의도하는 순간부터는 숙제가 되거든요. 그러면 공감 능력이 오히려 떨어질 수도 있어요. 관심 없는 거에는 관심 안 보이는 것도 좋아요.

저번에 했던 검사 결과를 보면, 실제보다 더 나쁘게 보이려는 ‘페이킹 배드 faking bad’ 결과가 나왔어요. 대부분 회사 복직을 앞둔 사람, 학교 다니기 싫어하는 사람들한테서 나오는 패턴인데요, 자신의 현재 상태보다 더 나쁘게 보이려고 하는 거죠. 실제 상태

보다 자신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페이킹 굿 faking good’은 주로 교도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결과예요. 자신이 이제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죠. 우울함보다는 불안감, 강박적인 양상이 나타나고, 사회적 관계에서의 불안감이 높아요.

그리고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수동적이에요. ‘내 사회적인 역할은 여성이니까 이 정도밖에 안 돼’라는 생각이 강하죠. 성격을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그 외에 큰 의미 있는 것들은 없고요. ‘굉장히 불안하고 사회생활 하는 걸 힘들어하는구나. 그리고 실제보다 본인 상태를 더 불편하게 느끼는구나’ 정도예요. 자신의 상태를 본인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굉장히 예민하고 우울하게 느끼고 있어요. 미치지 않았는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죠.

맞아요. 하지만 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면 더 괴로워져요. ‘나는 왜 이렇게 유난일까?’ 이렇게요.

선생님 기분부전장애는 찾아봤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한 번도 제 증상과 딱 맞는 설명이 없었는데, ‘이건 나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설명을 다 읽고 나서는 슬퍼졌어요. ‘옛날에 이걸 앓고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선생님 꼭 그 걱정까지 해야 할까요?

잘못된 건가요?

선생님 옳고 그름의 평가는 없어요. 독특하다는 거죠. 걱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과거가 아닌 지금 나의 현재 시점을 바라본다면,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요. 과거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병명을 몰랐는데, 현재는 알았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죠.

아……, 양가적인 감정의 원인은 뭔가요?

선생님 죄책감과 비슷해요. ‘목을 조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자동으로 죄책감이 드는 거죠. 화가 났다가도 바로 죄지은 사람이 되어버려요. 일종의 자기 처벌적인 욕구죠. 나 자신에게 너무도 강력한 초자아가 서 있기 때문이에요(실제 내가 쌓아온 것 말고도 여기저기서 더 좋은 걸 차용해서 이상화된 내 모습을 쌓아놓았다는 것).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에요. 그래서 매번 이상화된 기준에 도달하는 걸 실패하면서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거죠. 그렇게 엄격한 초자아가 있으면, 나중에는 벌을 받는 게 만족스러워지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사랑받는 것을 의심하고 일부러 상대에게 욕을 먹을 때까지 행동하면서, 상대가 나를 포기하면 오히려 안심하는 상태까지 가게 되는 거죠. 실제 내 모습보다 밖에서 제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렇군요. 혼자가 좋은데 혼자가 싫은 감정은요?

선생님 당연한 거 아닐까요?

당연해요?

선생님 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지만 나만의 공간도 필요하니까요. 이것 또한 공존할 수밖에
없죠.

제 자존감이 낮은 건가요?

선생님 극과 극은 오히려 통한다고 하죠. 굉장히 자존심이 세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자존감이 낮아요. 자신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우러러보게끔 하려고 하죠. 거꾸로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높으면,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든 크게 영향받지 않을 거예요(결국 난 자존감이 낮은 거라는 말).

제가 했던 일들이 지나고 나면 다 보잘것없이 느껴져요.

선생님 내가 하는 일의 상당수는 실제 내가 원했던 일이라기보다는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이나 의무감 때문에 해왔던 걸 수도 있어요.

외모 강박도 심해요. 화장하지 않으면 밖에 못 나가던 시절도 있었고요. 살찌면 아무도 저를 봐주지 않을 거 같아요.

선생님 외모 때문에 강박감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이상화된 내 모습이 있기 때문에 외모에 집착하는 거죠. 그 기준의 폭을 좁고 높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50킬로그램 이상이면 실패야!’ 이렇게요. 결국 이것저것 조금씩 시도해보면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어느 정도로 해야 편한지 알아보는 게 중요해요. 내 취향을 알고, 불안감을 낮추는 방법도 알게 된다면 만족감이 생겨요. 누가 어떤 지적을 해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게 되지요.

폭식도 연관이 있나요?

선생님 그렇죠. 일상의 만족도가 떨어지면 가장 원시적인 퇴행으로 돌아가요. 먹고 자는 본능적인 거로요. 만족감의 중추를 가장 편한 곳에서 찾는 거죠. 하지만 먹는 건 만족감이 오래가지 않아요. 운동이나 프로젝트 같은 게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장기적인 목표를 통해 극복하는 게 좋지요.

알겠어요.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겠네요.

 *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흔 출판사)’에 수록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불안 #우울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기분부전장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