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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고 싶을 때 낳을 권리

  • 김현경
  • 입력 2018.09.06 11:53
  • 수정 2018.09.06 11:58
7월 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모습
7월 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모습 ⓒ뉴스1
ⓒhuffpost

20년쯤 전,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나는 ‘자발적 임신 중단’을 한 적이 있다. 유학 초기여서 아직 박사논문 주제도 정하지 못했을 때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무사히 학업을 마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의사가 “임신을 유지하겠느냐”고 물었을 때(프랑스 의사들은 임신 사실을 알리면서 이렇게 묻는다) 나는 간단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자발적 임신 중단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구청에 가서 상담을 받아야 했다. 말하자면 ‘낙태 숙려제’다. 상담사는 나에게 어째서 임신 중단을 원하는지, 남자친구나 부모님이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이것은 온전히 나 자신의 결정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상담사는 더 묻지 않고 서류에 서명을 해주었다(이 제도는 현재 폐지되었다. 임신 중단을 원하는 여성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며, 불필요하게 시간을 끈다는 이유에서다).

수술을 위해서는 1박2일간 입원을 해야 했다. 오후에 입원해서 여러 검사를 받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저녁 늦게 의사들이 왔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게 끝나 있었다. 간호사가 미소 지으면서 쟁반에 담긴 아침식사를 가져왔다. 병원비는 전액 국가부담이어서 나는 서명만 하면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국가’가 나를 걱정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가가 내 몸을 걱정하고, 나의 장래를 걱정한다는 느낌. 그런 국가를 자기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프랑스 여성들이 언제나 국가로부터 이런 배려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도 50년 전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낙태가 불법이었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자들은 몰래 수술을 해줄 사람을 찾아다녀야 했다. 사르트르의 <자유의 길>에도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낙태를 위해 유대인 산파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68혁명을 거치면서다.

1971년, 343명의 “나쁜 년”들이 자기들이 낙태를 했음을 인정하면서, 낙태죄를 폐지하든지 아니면 자기들을 잡아가라고 선언한다. “나쁜 년들”의 명단에는 시몬 드 보부아르, 카트린 드뇌브, 잔 모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등 당대의 유명한 배우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3년 뒤 여성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베유법”이 의회를 통과한다.

한국은 왜 다른 나라들이 반세기 전에 이룬 것을 아직 시작도 못 하고 있을까? 보건복지부가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규정하면서 다시 모자보건법의 존폐가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벌써부터 체념의 분위기가 감돈다. 어쩌면 이것은 이 법이 있으나 마나 하고, 따라서 굳이 폐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낙태를 원하는 여자들은 의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더라도 인터넷에서 미프진을 구하거나, ‘사후 피임법’ 같은 응급조치에 의지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의적인 방식으로 임신 중단이 이루어지는 것은 여성의 건강을 크게 위협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낳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낳고 싶을 때 낳을 권리이다. 자발적인 임신 중단은 ‘생식의 권리’의 일부로서, 난임 치료와 똑같이 공적 의료체계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의료보험이 적용되어야 한다.

나는 보건복지부 관료들에게 양심을 가지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벌써 사방에서 돌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약 50년 전, 보부아르가 들었던 것과 같은 욕설을 듣는다면, 심지어 조금 기쁠 것 같기도 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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