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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양승태의 과거사 판결을 뒤집었다

피해자들을 구제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헌법재판소가 과거사 피해자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에 따라 보상금을 받은 경우 국가와 화해한 것으로 간주하는 ‘재판상 화해 간주’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일부위헌 결정을 내렸다. 또 과거사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피해자의 국가배상청구권에 민법상 소멸시효 제도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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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헌법재판소가 문제 삼은 ‘과거사 판결’은 한국전쟁 전후에 이뤄진 민간인 학살 사건, 군부정권 등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사건 등 수십 년은 지난 일들을 다룬다. 하지만 현행 민법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난 사건’에 대해서는 배상 청구를 할 수 없게끔 정하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그간 대법원은 과거사 사건 등에 대해서는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발생한 날로부터 10년)을 주장할 수 없다고 보았다.

“국가기관이 수사과정에서 한 위법행위 등으로 수집한 증거 등에 기초하여 공소가 제기되고 유죄의 확정판결까지 받았으나 재심사유의 존재 사실이 뒤늦게 밝혀짐에 따라 재심절차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된 후 국가기관의 위법행위 등을 원인으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재심절차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채권자가 손해배상청구를 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실상의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볼 것” (2013다201844)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대법원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은 시효로 소멸되지 않지만 6개월 내로 행사해야만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채권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러한 장애가 해소된 재심무죄판결 확정일로부터 민법상 시효정지의 경우에 준하는 6개월의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여야 한다” (2013다201844)

당시 법조계는 이 판결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민법 제766조는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손해배상청구권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 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행사하지 않거나(주관적 기산점)’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을 경과한 때(객관적 기산점)’에 소멸한다. 그런데 당시 대법원은 이런 민법상의 근거가 아닌 ‘6개월’이라는 기준을 제시했고 이 6개월이 법조문에 정확히 근거했던 게 아니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물론 이 ‘6개월’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13년 5월 대법원은 과거사정리와 관련한 손해배상을 판결하며 “‘상당한 기간’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민법상 시효정지의 경우에 준하여 단기간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바로 ‘시효정지의 경우에 준하여’가 근거다. 민법 제179조부터 제182조까지는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사실상의 장애사유’를 규정하며 이 기간 동안은 소멸시효가 ‘정지’된다고 정하고 있다. 즉 이번 헌법재판소가 판결문에 썼던 것처럼 “국가가 소속 공무원들의 조직적 관여를 통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집단 희생시키거나 장기간의 불법구금·고문 등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유죄판결을 하고 사후에도 조작·은폐를 통해 진상규명을 저해하였다”는 점이 ‘사실상의 장애사유’로 보았던 것이다.

대법원의 이 같은 판결은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를 가로막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대법원이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로부터 6개월이 지나서 배상을 청구한 피해자들의 소제기를 연이어 기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양승태의 법원행정처가 이 판결을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에 협조한 사례’로 적시하면서 사실상 정권의 입맛에 맞춘 판결이 아니냐는 비난이 잇따랐다.

 

신임 헌법재판소 소장으로 지명된 유남석 헌법재판관이 3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긴급조치 피해자 패소판결' 재판취소 등 헌법소원 선고를 위해 대심판정에 착석하고 있다. 2
신임 헌법재판소 소장으로 지명된 유남석 헌법재판관이 3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긴급조치 피해자 패소판결' 재판취소 등 헌법소원 선고를 위해 대심판정에 착석하고 있다. 2 ⓒ뉴스1

 

결국 헌법재판소가 나서 이 판결에 대해 정리했다. 헌법재판소는 먼저 과거사 문제는 ”국가기관이 국민에게 누명을 씌워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소속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관여하였으며, 사후에도 조작·은폐함으로써 오랜 기간 진실규명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 일반적인 소멸시효 법리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운 문제”라며 사건 발생 후부터 10년 이후에는 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가배상청구권은 단순한 재산권 보장의 의미를 넘어 헌법 제29조 제1항(공무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에서 특별히 보장한 기본권으로서,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는 국가가 오히려 국민에 대해 불법행위를 저지른 경우 이를 사후적으로 회복·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한 기본권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사정리법이 정한 위 사건에 대해서는 민법 제766조 제1항이 정한 주관적 기산점 및 이를 기초로 한 단기소멸시효만 적용된다”

대법원의 판례와 입장이 달라진 부분은 앞서 언급한 ‘6개월’이다. 헌법재판소는 과거사정리법 등을 통해 ‘진실규명 결정’이 있었던 날을 ‘소멸시효의 정지’가 끝난 날이 아니라 소멸시효의 주관적 기산점인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 보았다. 즉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재심판결 확정일’이나 ‘진실규명 결정일’로부터 6개월이 아닌 3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 등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진실규명결정이 있었던 때에 손해 및 가해자를 알았다고 볼 수 있으므로, 피해자 등은 진실규명결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에 국가배상을 청구하여야 한다”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시기를 놓쳐 국가에 소송을 제기하지 못해 배상청구권을 박탈당한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길이 열리게 되었다.

헌법재판소는 같은 날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의 보상금 등 지급 결정에 동의한 때에는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미친다고 볼 수 있다”며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를 봉쇄한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도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관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해당 사건의 헌법 소원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거나 언론탄압에 맞서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국가기관의 지시에 따라 해고되거나 재취업이 어렵게 된 사람, 혹은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거나 국가기관의 지시에 따라 직장에서 해고된 사람 등 소위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난 2002년 이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 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결정되었고 그간의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일부 수령했다.

2010년 이후, 긴급조치 위반을 이유로 이들이 당한 해고나 유죄판결은 재심을 통해 대부분 취소되었고 이들은 이 재심을 근거로 국가가 벌인 노동조합활동 방해, 강제 해고, 블랙리스트 작성·배포에 의한 취업방해, 불법 체포·구금·고문 등의 가혹행위, 출소 이후에도 계속된 감시, 위헌·무효인 긴급조치 등에 근거한 유죄판결의 선고 등에 대해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피해자들이 이미 ‘민주화보상법’에 의해 보상금을 받았고 이는 재판상 화해와 같다며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의 이 결정에 대해 먼저 “관련자와 유족이 위원회의 보상금 등 지급결정이 일응 적절한 배·보상에 해당된다고 판단하여 이에 동의하고 보상금 등을 수령한 경우 국가배상청구권의 추가적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제재로 볼 수 없다”면서도 “민주화보상법상 보상금 등에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며 “정신적 손해에 관한 국가배상청구마저 금지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제재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는 국가에 배상을 청구할 길이 열린 셈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단법인 긴급조치 사람들 회원들이 3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긴급조치 등 과거사 관련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단법인 긴급조치 사람들 회원들이 3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긴급조치 등 과거사 관련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으로 인해 피해자들도 한시름 덜게 되었다. 과거 벌어진 국가공권력의 폭력행위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폭력 고문 피해자들이 받은 국가 배상금의 일부를 출연해 만든 시민단체인 ‘진실의 힘’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피해자들의 오랜 기다림과 삶에 답하는 최소한의 시작”이라며 “헌재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실의 힘은 “하지만 피해자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지 4년 반이나 흐른 다음에야 나온 이 결정을 앞에 놓고 기쁘다기보다는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고 아쉬움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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