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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말한다

ⓒMichał Chodyra via Getty Images
ⓒhuffpost

한 교사가 수업시간에 ‘구지가’를 설명하며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고 학생들이 이를 성희롱으로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내게도 교실 안의 여학생 시절이 있었기에 그 상황에 대한 별도의 상상력은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일이라 함부로 견해를 밝힐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해봤다.

눈에 들어온 건 이 교사를 개인적으로 안다는 사람이 적어낸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서사였다. 훌륭한 교육자가 어째서 성희롱할 리 없는 사람이라는 근거가 되는지 의아했다. 좋은 아빠도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칠판 위에 여자 가슴을 그리며 “가슴은 이렇게 생긴 게 예쁜 거야”라던 영어교사도 교육자로서 신념을 가진 교사일 수 있다. 뜀틀 위에서 구르기 시범을 보이던 체육부장의 엉덩이를 수많은 아이들 앞에서 북처럼 두드리던 체육교사도 동료들 사이에서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학생들이 실제로 겪은 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자신이 평소 맺고 있는 관계에 기대어 결과적으로 그럴 리 없다는 주장을 하는 모습이 매우 언짢았다. 이제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엄숙주의를 운운하며 문학 해석의 자유가 상실된 듯 개탄하는 목소리가 나오면 본래 사건이 뭐였는지는 상관없어진다. 학생들이 경험한 많은 사건은 오직 ‘구지가’로만 축약되어 버렸다.

잘 몰라도 말할 수 있다는 게 권력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이미 권력이 균등하지 않다. 어떤 언론은 ‘황당 미투’라는 제목을 붙였다.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앞장서서 교사의 억울함을 대변해주는 태도야말로 과연 교육적인가. 이야기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권력욕이다.

성폭력을 둘러싼 논쟁은 많은 경우 이처럼 평판 싸움이 끼어든다. 대체로 그럴 사람이 아닌 가해자와 당할 만한 피해자의 구도가 만들어진다. 평판에 있어 여성들은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다.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누구이며 누구의 말이 더 객관적 (힘센 주관) 위치를 점하는지 생각해보라. 평판 싸움에서 대부분 여성들은 진다. 많은 성폭력 판결에서 위력은 폭력과 인과관계가 없지만, 피해자에 대한 평판은 사건과 인과관계를 가진다.

폭력의 개념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규정된다. 성폭력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대부분 폭력이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집착한다. 한 사건의 피해자는 모든 일상에서 피해자 역할을 하지 않으면 피해 상황을 인정받지 못한다.

직장에서 상하관계가 남녀관계로 불리는 순간 여성은 노동자가 아니라 남자 홀리는 마녀로 등극한다.

안희정 성폭력 혐의 사건은 이 ‘마녀’를 심판했다. 피해자 정체성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따졌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는 입을 열었으나 안희정에게는 귀를 열었다. 무엇보다 재판부의 가장 큰 ‘죄’는 ‘법이 없어 처벌 못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성차별주의자들이 당당하게 표출할 수 있는 사법적 근거를 마련해줬다는 점이다.

강간 문화는 살아서 말하는 성폭력 피해자를 멸시한다. 피해 당사자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피해자의 진정성을 인정한다. 말하지 않는 피해자, 곧 죽음을 뜻한다. 그 후 가증스럽게도 강간 문화는 피해자를 추모한다.

배우 장자연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살아 있는 성폭력 피해자를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피해자가 자신의 입으로 구성하는 서사는 믿지 않는다. 말하기는 피해자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죽지 않고 살아가며 진실을 밝힐 것이다. 여성들이 겹겹이 목소리를 쌓아 서사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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