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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두환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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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한 다음 국내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서울올림픽을 취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한국 대표단이 IOC 위원들의 마음을 확 돌려놓을 연설을 했단다.

내용인즉슨 “우리 국민들은 서울올림픽에 엄청난 기대를 걸고 준비하고 있다. 이미 메인 스타디움도 거의 다 지었고, 각종 준비도 차곡차곡 진행 중이다. 만일 여러분들이 우리에게서 올림픽을 뺏어간다면, 우리는 메인 스타디움을 거대한 메모리얼(묘지)로 만들어 거기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운 다음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한국인의 희망을 짓밟은 자들 여기 잠들다’라고.”

IOC 위원들이 이 이야기에 감동했는지 아니면 무서운 협박이라 여겼는지 알 수 없지만 올림픽은 열렸고, 전두환의 스포츠 정책의 개가로 기록되었으며, 그 관계자들의 이름이 올림픽과 함께 영원히 기억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노태우 홍보 만화에 실려 있다. 노태우는 기억당한다는 일의 거룩함과 두려움에 대해, 이름 불리는 일의 무거움에 대해 최소한 알기는 했나 보다.

이름을 부르는 일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 조상들은 부모가 지어주신 이름 대신 다양한 호를 부르는 풍속이 있었는데, 추사의 경우 500가지가 넘는 별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한다. 국왕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고자 기휘하는 풍습도 마찬가지다. 동서양의 옛 동화에도 악마의 본이름을 불러 악을 퇴치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얼마 전 작고한 어설라 르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라든가, <톰 티트 토트> 같은 서양 동화. 본색을 들킨 도깨비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우리 옛 동화. 최근에는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자’라는 형식으로 등장한 볼드모트. 이름이 지닌 힘에 대한 외경심.

고문경찰 이근안, 탁 치니 억 강민창, 가족 갑질 조양호, 꽃을 받으삼 박삼구, 안희정 1심 판사 조병구, 재판거래 양승태….

우리는 이런 이름들을 기억한다. 요즘은 내 두뇌가 기억을 못해도 인터넷이 기억한다. 기억 용량을 확대시킨 인간의 기술은 나쁜 점도 많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악행을 저지른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순기능도 있다. 지구 어딘가엔 이러한 이름을 새겨넣은, 잠실운동장 대신 잠실서버가 차근차근 구축될 수도 있다. 영화 <신과 함께>가 공전의 흥행을 한 까닭으로 이 “잊지 않겠다”는 민중의 마음, 역사가 안 되면 기억의 법정에서라도 정의로운 심판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어떤 사악한 통치자도, 탐욕스러운 정치가도 일하는 사람들의 하루하루의 노동 없이는 국가를 유지할 수가 없다. 어떤 대단한 부자도, 대단한 권력자도 그들을 도와주는 보통사람들의 노동 없이는 굶어 죽는다. 어떤 대단한 장군도 용맹한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전투에서 승리하진 못한다. 기계가 일손을 대신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공장일수록 먼지와 바람과 전기와 시스템이 더 많은 사고를 친다.

모든 일손이 파업을 해버린 상황을 상상해보라. 아파트 105층에서 걸어 내려와야 하고 상한 음식을 제대로 조리할 수도 없어 날것으로 먹어야 하는 생활이 일주일쯤만 지속되어도 그 고통이 극에 달할 것이다. 모든 병사가 파업해버린 상황을 상상해본다. 무기만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은 없을 것이다. 전쟁광 부시 일가가 세번째로 집권을 하더라도.

모든 여성이 파업을 해버린 상황을 상상해본다. 지구상 어디에도 엄마는 없고 아내도 없으며, 저만 아는 거인의 겨울만 이어지는 정원처럼 세상은 회색빛으로 변하고, 여성을 오로지 수단으로만 여겨온 사람들의 이름을 대대손손 기억해줄 후손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파업하지 않는다. 세상을 사랑하고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소심하게 대대손손 기억하면서 저항한다. 더 많은 기억으로 저항한다.

전두환이 알츠하이머 초기라고 한다. 그는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자신을 지워내는 방식으로 역사의 심판을 피해 가고 싶었나 보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기념되고 싶은 이야기만 골라 써놓았다. 거기에는 5·18 발포 책임자 전두환이란 이름도, 3S(스크린, 스포츠, 섹스) 따위로 국민을 타락시키고자 한 전두환이란 이름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그는 국립묘지에 묻혀서는 안 되는 사람이란 것을.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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