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8년 08월 27일 13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8월 27일 13시 51분 KST

‘구조맹’의 ‘피해자 탓하기’

yurii_zym via Getty Images
huffpost

빈곤 문제를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초기 서양 학자들은 빈곤 퇴치의 열정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연구 결과가 축적되면 될수록 빈곤의 주요 책임이 부유층보다는 빈곤층에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문제는 그들의 연구 방법에 있었다.
학자들은 달동네를 방문해 주민들의 행태를 관찰하고 인터뷰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빈곤의 원인을 찾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연구 결과, 빈곤층의 라이프스타일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게 밝혀졌다. 이들의 삶엔 계획, 일관성, ‘욕망의 지연’, 자기계발은 없는 반면 음주, 흡연, 뒷담화, 싸움질은 많았다. 고로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연구방법은 ‘피해자 탓하기’라는 예정된 결론을 내포한 것이다. 구조적 문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이다. 빈곤층의 라이프스타일은 빈곤의 증상이지 원인이 아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에게 부유층의 재테크 마인드를 기대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일부 부유층이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축적하는 동안 빈곤층은 수입의 큰 부분을 주거비로 써야 하는 현실을 외면하고, 고작 라이프스타일에서 답을 찾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희망이 없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보인 행태를 거꾸로 뒤집어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건 ‘연구 편의주의’의 산물이다. 빈곤층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건 쉬워도 부유층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건 어렵다. 어떤 부자가 학자의 관찰과 인터뷰에 응하겠는가? 부자를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부유층이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는지는 철저한 프라이버시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현미경을 들이대면서까지 미세하게 까발려지는 건 사회적 약자 또는 피해자의 삶이며, 이는 고스란히 약자나 피해자를 탓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학문 세계에선 이런 ‘피해자 탓하기’ 연구의 문제가 널리 알려졌지만, 법과 언론 영역에선 아직도 건재하다. 구조의 문제를 배격하면서 미시적인 증거나 ‘팩트’를 숭배하는 관행이 바로 그것이다. 증거나 팩트를 찾아내려는 접근성에서 강자나 가해자는 약자나 피해자에 비해 현저한 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점은 무시된다. 이게 무슨 자연의 질서나 되는 것처럼 당연시하면서 부르짖는 증거나 팩트의 신성성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우리는 ‘구조 개혁’이라는 말을 즐겨 쓰면서도 그 대상을 사람에만 국한시키는 묘한 버릇을 갖고 있다.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사람만 바꾸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구조’라는 말을 슬로건으로만 쓸 뿐 그 정체를 탐구하는 법은 없다. 그래서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말은 습관적으로 하지만 추상의 세계에만 갇혀 지내온 구조를 무슨 수로 어떻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구조를 외면하고 개인 탓만 하는 사람을 가리켜 ‘구조맹’이라고 폄하하지만,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문제에 이르면 모두가 다 구조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조의 문제는 우리 주변의 일상적 삶에도 숱하게 널려 있다. 작은 집단이나 조직에서 통용되는 불합리한 관행은 시간이 흐르면서 구조로 정착된다. 이런 ‘관행의 구조화’는 수년간에 걸친 언론 뉴스를 보면 쉽게 확인된다. 매년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됨에도 언론은 늘 새롭다는 듯 사건에 대해서만 미주알고주알 보도한다. 그런 사건을 일어나게 만든 구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구조의 변화를 요구하면서 그걸 추적 보도하는 법은 없다. 단지 흥미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말이다.

무리 없이 구조를 바꾸기 위해선 부작용에 대한 보완책을 포함한 세밀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매뉴얼이라고 해도 좋다. 이게 언론의 주요 뉴스거리가 되어야 한다. 사건의 흥미성에 집착하는 언론의 입장에선 이런 제안이 미친 짓으로 여겨질 게 틀림없다. 하지만 어차피 디지털 혁명으로 죽기 일보 직전인 언론의 처지에선 그렇게 펄펄 뛸 일은 아니다. 전 국민의 기자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선 흥미성 위주의 뉴스는 아무리 ‘단독’을 외쳐대도 개별 언론의 차별성이나 브랜드 파워를 살리지 못한다. 기성 언론의 비교우위는 고도의 실력과 분석을 요구하는 ‘미친 짓’에서 나올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