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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린 버스는 왜 꼭 만원일까

한국엔 이를 막기 위한 선진 시스템이 도입돼있다

1980년대 초 헝가리 부다페스트 버스 얘기다. 혼잡한 시간대에 늘어난 승객을 태우려 버스를 늘려 배차한 노선에서, 45분을 기다려 만원버스가 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거의 텅 빈 버스가 3, 4대 연이어 도착하기도 해서, 버스 증차의 효과가 별로 없었다 한다. 부다페스트의 버스 관리자는 앞차가 정차해 있다면 그 버스의 출발까지 기다리지 말고, 뒤차가 앞차를 앞질러 갈 수 있도록 현명하게 규정을 바꿨다.

다들 이런 경험 있을 거다. 집에 가는 퇴근길, 북적이는 만원 지하철을 막 놓쳐 속상한데, 글쎄, 바로 다음 텅 빈 지하철이 와 기뻤던 경험. 배차 간격이 일정한데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간혹 겪는 신기한 일이다. 그림 1처럼 말이다. 정류장(작은 수직 막대로 표시)에 도착한 붉은색의 만원 버스 다음에는 파란색의 텅 빈 버스가 오고 있다. 이런 일은 왜 생길까.

 

이대경 연구원이 얻은 버스 운행 모델 시뮬레이션 결과. 짧은 수직 막대가 버스 정류장이 있는 위치다. 첫 두 버스 정류장에 다가오는 만원 버스(붉은색) 뒤에는 승객이 적은 버스(파란색)가 바짝 붙어 다가오고 있다. 중간중간에 흐릿한 색의 버스들은 승객 혼잡도가 중간쯤 되는 것들이다. 
이대경 연구원이 얻은 버스 운행 모델 시뮬레이션 결과. 짧은 수직 막대가 버스 정류장이 있는 위치다. 첫 두 버스 정류장에 다가오는 만원 버스(붉은색) 뒤에는 승객이 적은 버스(파란색)가 바짝 붙어 다가오고 있다. 중간중간에 흐릿한 색의 버스들은 승객 혼잡도가 중간쯤 되는 것들이다.  ⓒ김범준

 

‘어느 물리학자의 일상‘은 일본 물리학자 데라다 도라히코(1878~1935)가 쓴 멋진 수필집이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에게서 젊어서 문학을 사사해, 물리학과 문학, 두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부 ‘생활에서’에는 요절한 젊은 아내의 이야기 등 본인 인생의 경험을 간결한 문체로 감동적으로 적은 수필들이 담겼고, 2부 ‘과학에서’에는 물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의 이야기가 재밌게 적혀 있다. 과학자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2부를 꼭 볼 것. 물리학자라는 특이한 집단(나도 그중 하나다)의 재밌는 속성을 거의 백 년 전의 수필집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떻게 해야 집 정원 잔디를 가장 적은 역학적 에너지로 깎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 대목에서 내가 아는 한 물리학자가 떠올라 혼자 낄낄대며 읽었다. 수필집의 ‘전차 혼잡에 대해’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1922년 일본의 만원 전차에 대한 경험을 소개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만원 전차를 한두 번 보내고 나면 승객이 적은 전차가 오게 마련이란다. 왜 그럴까.

터미널에서 12시, 12시 10분, 12시 20분, 이렇게 10분 간격으로 버스가 출발하고, 노선의 첫 정류장까지는 10분이 걸려, 도착 예상시간이 12시 10분, 12시 20분, 12시 30분이라 하자. 터미널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출발하더라도 도로의 교통상황 등의 이유로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를 수 있다. 도중의 차량정체로 어쩌다 5분 늦어져 첫 정류장에 예상시간인 12시 10분이 아니라, 12시 15분에 도착했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정류장에 사람들이 1분에 1명꼴로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린다고 가정하자. 12시 10분에 예정대로 도착했다면 10명의 승객이 탑승하겠지만, 5분이 늦어져 15분 만에 버스가 왔으니, 늦어진 이 버스에는 15명의 승객이 탑승한다. 버스비를 결제하는 등의 시간도 당연히 좀 더 길어진다. 이 버스가 그다음 10분 거리의 두 번째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원래의 예상시간인 12시 20분도 아니고, 첫 구간의 정체로 5분이 늦어진 12시 25분도 아니다.

첫 정류장에서 늘어난 승객을 태우다 지체되어 더 늦은 시간이 된다. 버스가 더 지연되어 도착하니 두 번째 정류장에서는 15명보다 더 많은 승객을 태우게 된다. 이처럼, 어쩌다 늦어진 버스는 점점 더 승객수가 늘어나 만원이 된다. 자, 이 버스를 뒤쫓아 오는 다음 버스는 어떨까. 12시 10분에 버스 터미널을 떠난 두 번째 버스는 교통상황에 문제가 없어서 정확히 12시 20분에 첫 정류장에 도착한다. 기억하시는지? 첫 번째 버스는 이 정류장에 12시 15분에 도착해 승객을 태우고 떠났다. 따라서, 이 정류장에는 5분도 안 되는 시간을 기다린 5명의 승객만이 있다. 승객이 적으니 탑승시간도 짧아, 이 두 번째 버스가 두 번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원래의 예정인 12시 30분보다 더 이를 수도 있다. 결과는? 만원 버스가 오래 버스를 기다린 많은 승객을 태우고 출발하면, 바로 뒤를 이어서는 승객이 적은 버스가 금방 올 수 있다. 좀 다르게 설명했지만, 데라다 도라히코가 이미 책에서 한 얘기다. 전차의 도착시각과 승객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저자가 직접 관찰해 만든 테이블도 실려 있다. 물리학자로서의 특성이 엿보인다. 실험을 통한 이론의 검증이라고나 할까.

마크 뷰캐넌의 ‘사회적 원자’에도 같은 얘기가 등장한다. 1980년대 초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버스 얘기다. 혼잡한 시간대에 늘어난 승객을 태우려 버스를 늘려 배차한 노선에서, 45분을 기다려 만원버스가 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거의 텅 빈 버스가 서너대 연이어 도착하기도 해서, 버스 증차의 효과가 별로 없었다 한다. 이유는 위의 설명과 정확히 같다. 이유를 알면 해결도 쉽다. 부다페스트의 버스 관리자는 앞차가 정차해 있다면 그 버스의 출발까지 기다리지 말고, 뒤차가 앞차를 앞질러 갈 수 있도록 현명하게 규정을 바꿨다. 곧바로 문제 해결.

 

버스 모델 시뮬레이션 결과. 오랜만에 도착한 버스에는 많은 승객이, 금방 도착한 버스에는 적은 승객이 있어서, 버스의 도착 시간 간격과 승객수는 양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버스 모델 시뮬레이션 결과. 오랜만에 도착한 버스에는 많은 승객이, 금방 도착한 버스에는 적은 승객이 있어서, 버스의 도착 시간 간격과 승객수는 양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김범준

 

 

버스의 도착 시간 간격과 그다음 버스의 도착 시간 간격은 음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오래 기다려 도착한 만원 버스는 보내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 텅 빈 버스가 금방 도착할 가능성이 크다.
버스의 도착 시간 간격과 그다음 버스의 도착 시간 간격은 음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오래 기다려 도착한 만원 버스는 보내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 텅 빈 버스가 금방 도착할 가능성이 크다. ⓒ김범준

후다닥 결과를 얻는 능력자인 우리 연구그룹의 이대경 연구원이, 위에서 설명한 간단한 규칙을 넣은 모델을 만들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결과를 얻었다. 배차 간격이 5분인 노선의 한 정류장에서 지금 막 도착한 버스가 앞 버스가 도착한 후 몇 분 만에 도착했는지(그림의 가로축 ‘도착 시간 간격’)와 그 버스의 승객수가 얼마나 되는지(세로축) 그린 그림 2를 보면, 위에서 설명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오랜만에 도착한 버스에는 승객이 많고, 짧은 시간 안에 도착한 버스에는 승객이 적다. 그림 3에는 앞차의 도착 시간 간격(가로축)이 다음 차의 도착 시간 간격(세로축)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그려보았다. 명확한 음의 상관관계를 보인다. 오래 기다려 도착한 버스 다음의 뒤차는 금방 도착한다는 뜻이다. 바로, 1922년 데라다 도라히코가 일본 전차에서 발견한 현상이다. 오래 기다려 만원 전차가 도착하면 그 전차를 그냥 보내라. 손님이 적은 전차가 금방 오니까. 이대경 연구원은 부다페스트의 “앞차가 멈춰 승객을 태우고 있으면 뒤차는 앞차를 지나쳐라”는 규칙도 적용해 봤다. 승객이 한 버스에 몰리고 그다음 버스에는 승객이 적어지는 현상이 완화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수원 성균관대 앞을 지나는 좌석 버스 노선의 버스 도착 시간 간격의 차이는 음의 상관관계를 보인다.
수원 성균관대 앞을 지나는 좌석 버스 노선의 버스 도착 시간 간격의 차이는 음의 상관관계를 보인다. ⓒ김범준

 

21세기 우리나라는 어떨까. 나도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지만, 뒤차가 정차해 있는 앞차를 앞질러 가는 버스는 사실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버스도, 문제 해결 전 부다페스트 버스나 1922년 일본 전차와 같은 패턴을 보여줄까. 내가 속한 물리학과에서는 학부 졸업논문을 작성하는 것이 졸업요건 중 하나다. 성균관대 물리학과 이동명 학생이 학교 앞을 지나는 좌석버스 노선을 택해서, 버스 도착시각과 승객수 정보를 모았다. 데라다 도라히코처럼 힘들게 정류장에서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모은 것이 아니라, 한 포털 사이트에서 화면에 보여주는 정보로 쉽게 모았다.

막상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모델 시뮬레이션에서 보았던 그림 2와 그림 3의 결과가 눈에 띄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림 3의 시뮬레이션 결과에서는 한 버스의 도착 시간 간격과 그다음 도착 시간 간격 사이에 명확한 음의 상관관계를 볼 수 있지만, 실제 수집한 버스 자료는 그렇지 않았다. 오랜만에 도착한 만원버스가 떠나면, 곧이어 텅 빈 버스가 오는 현상은, 1922년 일본 전차와 달리,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더 재밌다. 의외의 결과가 더 흥미롭다. 궁금해진 이동명 학생이 같은 데이터를 다르게 분석했다. 이번에는 버스 도착 시간 간격의 차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본 거다. 그 결과가 그림 4다. 버스의 도착 시간 간격이 늘어나면(가로축의 값이 양), 그 다음의 도착 시간 간격은 줄어드는(세로축의 값이 음)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버스들 사이의 시간 간격이 10분에서 20분으로 늘어나면(즉, 정류장에 버스가 10분 만에 도착해 떠나고, 그다음 버스는 더 늦어진 20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도착하는 상황), 버스의 도착 시각 간격의 차이는 20분 ? 10분 = 10분이다. 그림 4를 보면 가로축이 10분일 때 세로축의 값은 ?10분(=10 ? 20) 정도라서, 이제 세 번째의 그다음 버스는 10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도착한다. 10분, 20분 간격 다음에는 간격이 10분으로 다시 준다. 도중에 버스 간격이 늘어나면 그 전의 버스 간격으로 돌이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한겨레신문사를 통해 서울시버스노동조합에 문의해보았다. 현재 버스 안에는 앞차 두 대, 뒤차 두 대까지의 간격을 볼 수 있는 모니터가 있어, 앞차와의 간격이 벌어지면 속도를 높이거나 하는 식으로 버스 사이의 간격을 조절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1922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방식으로 현재 우리나라 버스는 운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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