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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왜곡된 ‘하이퍼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들

‘포토 리얼리즘’이 아니다. ‘하이퍼 리얼리즘’이다.

ⓒChuck Close
ⓒhuffpost

가끔 전시장에서 어떤 회화 작품을 보면 이게 사진인지 그림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림이라고 하기엔 그 명징한 묘사와 사실적인 표현에 놀라고, 좀 더 가까이 접근해 그림을 관찰하면 겹겹이 쌓인 붓질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주제 의식에 대한 이해나 대상의 호오를 따지기 전에 감각적으로 두 눈을 통해 쏟아지는 이 현실적 환상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예술의 속성을 두루 갖췄다. 시선 끌기와 감탄, 그리고 즐거움 말이다. 이처럼 사진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대상을 평면과 입체로 구현하는 미술 사조를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이라고 한다. 우리 말로 옮기면 ‘극사실주의極寫實主義’ 정도가 알맞은 단어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는 그 대중적 인기에 비해 하이퍼 리얼리즘의 정의가 뒤틀리고 오역된 부분이 많다. 막말로 상고 시대의 애매한 정의를 그대로 번역해 수십 년 간 우려먹는다고 해야 할까. 문제는 이게 맞기라도 하면 옛 문서의 특질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지금은 완전히 틀렸다는 데 있다. 한국의 대중 지식을 지배하는 네이버에서 하이퍼 리얼리즘을 검색해보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진처럼 극명한 사실주의적 화면 구성을 추구하는 예술’. 바로 혼돈의 도가니를 만드는 주범이다. 위 문장이 지칭하는 양식은 정확히 말해 ‘포토 리얼리즘Photo-Realism’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포토 리얼리즘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동의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당장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된 평론문만 하더라도 하이퍼 리얼리즘과 장 보드리아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크르simulacre 간의 관계를 다루기 앞서 맨 앞 단에 하이퍼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카메라 렌즈처럼 현실을 복사해 담아내는 하이퍼 리얼리즘은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진처럼 극명한 사실적 구성을 추구하는 예술 양식이다. 이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의 미국, 유럽의 미술사 양식이며 슈퍼 리얼리즘, 포토 리얼리즘, 래디컬 리얼리즘 등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포토 리얼리즘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시조이자 그 시작점일 뿐, 현재 쓰이는 하이퍼 리얼리즘이란 용어는 21세기 들어 안착됐다. 즉, 포토 리얼리즘과 하이퍼 리얼리즘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포토 리얼리즘과 하이퍼 리얼리즘은 무엇이 다른 걸까. 팝 아트의 준동에서 영향 받은 포토 리얼리즘은 다루는 대상이 일상적이다. 딱히 의미 없는 장소, 사람, 물건 등을 소재로 다루면서 매우 사실적이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사진처럼. 실제 포토 리얼리즘 작가 중에는 사진을 직접 찍은 후 이를 캔버스에 프로젝터로 쏘아 그 형상을 모사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특히 포토 리얼리즘의 방점은 ‘주관을 배제하는 것’에 찍혀 있다. 매일 지나치는 일상적인 이미지를 무심하게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을 있는 그대로 따라 그리는 포토 리얼리즘은 예술이 아닌 기술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자기 진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사진이 포착한 이미지를 뛰어 넘어 비현실에 가까운 현실감을 추구하고, 작가의 주관과 아이디어를 수용해 내러티브까지 구현한 지점이 우리에게 익숙한 21세기 하이퍼 리얼리즘의 현 주소다.

이런 포토 리얼리즘과 하이퍼 리얼리즘의 연대기를 몸소 보여주는 작가가 바로 척 클로스Chuck Close다. 그는 포토 리얼리즘 시대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선두주자였고, 이후 다양한 재료와 방식을 이용해 스스로 진보하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한 덕분에 하이퍼 리얼리즘 계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1940년 태어난 클로스는 어렸을 적부터 안면 인식 장애로 고생한 경험 때문에 예일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 공부를 마치고 포토 리얼리즘에 빠져들면서 사람의 얼굴을 거대한 캠퍼스에 구현하는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업을 일명 ‘머리들heads’이라 칭하면서.

참고로 포토 리얼리즘은 뉴욕의 갤러리스트인 루이스 마이즐Louis Meisel을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그는 포토 리얼리즘을 행하는 작가, 즉 포토 리얼리스트에 대한 규정까지 만들기도 했다. 잠시만 읽어봐도 포토 리얼리즘과 하이퍼 리얼리즘을 동일시하는 네이버 검색 결과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살펴보자.

포토 리얼리스트의 규정

  1. 포토 리얼리스트는 정보를 모으기 위해 카메라와 사진을 사용한다.
  2. 포토 리얼리스트는 정보를 캔버스에 옮기기 위해 기계적, 혹은 반기계적 수단을 사용한다.
  3. 포토 리얼리스트는 완성된 작품을 사진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4. 주요한 포토 리얼리스트로 인정받으려면 1972년까지 포토 리얼리스트로서 작품을 전시했던 작가여야 한다.
  5. 작가는 포토 리얼리즘 작품의 개발과 전시를 위해 적어도 5년을 바친 사람이어야 한다.
인쇄 원리를 회화 작업에 적용한 'Mark'
인쇄 원리를 회화 작업에 적용한 'Mark' ⓒChuck Close
'Mark'
'Mark' ⓒChuck Close
'Self-Portrait'
'Self-Portrait' ⓒChuck Close

클로스는 격자grid를 이용해 사진 이미지를 화폭에 정밀하게 옮기는 흑백 초상화로 명성을 얻어 위 규정에 딱 어울리는 포토 리얼리즘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노란색, 파란색, 빨강색을 따로 칠하는 인쇄 기법을 활용한 컬러 초상화로 작품 세계를 확장하였고 화가로서 명성이 최고조에 이르던 1988년 갑작스런 사고로 전신마비가 오자 투쟁에 가까운 재활 치료와 붓을 손에 붙이고 작업하는 열정으로 오히려 새로운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격자 안에 여러 색과 추상적인 형상을 섞어, 가까이서 보면 세포 같지만 멀리서 보면 일렁이는 얼굴이 연상되는 작업 세계로의 진화는 ‘척 클로스’ 스타일을 완성하며 ‘105년 후에도 살아남을 현대 화가’라는 격찬을 받게 된다. 즉, 포토 리얼리즘과 하이퍼 리얼리즘의 역사를 관통하던 그는 결국 자신만의 경지에 올라 유파에 구애 받지 않는 대체 불가능한 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작년 미투Me Too 운동으로 과거 성추행이 폭로되면서 예술가로서 그의 입지는 이제 아무도 모르게 되었지만 말이다.

'Emma'
'Emma' ⓒChuck Close

회화에 척 클로스가 있다면 조각에는 론 뮤익Ron Mueck이 있다. 1958년 생으로 호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는 론 뮤익은 제도권의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 영화 특수 효과 팀에서 일하며 작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그의 재능을 알아챈 사람이 바로 영국의 유명 컬렉터이자 사치 갤러리의 회장인 찰스 사치Charles Saatchi였다. 1997년 사치가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서 기획한 전시 <센세이션Sensation>은 엄청난 논란 속에서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등을 YBAs(Young British Artists)란 이름 아래 세계 미술 시장의 핵심으로 밀어 넣었는데, 이 역사적인 전시에 론 뮤익 또한 실제 아버지 유체의 2/3 사이즈로 만든 ‘죽은 아버지Dead Dad’란 작업으로 참여하며 일약 스타 작가가 되었다. 이후 꾸준히 선보인 초대형 극사실주의 인체 조각들은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탄생과 죽음을 압축시킨 장대한 서사시’란 찬사를 받으며 론 뮤익을 현 시대 가장 인기있는 조각가 중 한 사람으로 등극시켰다. 온전히 완성시키려면 적어도 1~2년이 걸리는 그의 작업은 어디에 있든 관람자의 시선을 훔치는 본능적인 마력을 지녔다.

'Dead Dad'
'Dead Dad' ⓒRon Mueck
'In Bed'
'In Bed' ⓒRon Mueck
'Big Man'
'Big Man' ⓒRon Mueck
'Mask II'
'Mask II' ⓒRon Mueck

전 세계적으로 하이퍼 리얼리즘은 인기 있는 미술 장르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마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예술혼을 쉽게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직관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는 작가군은 많지만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로는 단연 정중원을 꼽고 싶다. 1988년 생으로 젊은 작가 군에 속하는 정중원은 나이와는 상관 없는 연륜 있는 테크닉으로 탄성을 자아낸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고 회화 작가로 전향한 케이스인데, 공력을 집중한 세밀한 필치도 압권이지만 그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실체가 명확치 않은 인물의 초상을 화폭으로 가져온다는 점이다. 가령 호메로스Homer나 세네카Seneca 등 조각으로만 남아있는 인물의 실제 모습을 유추해 재현하는 과정을 보면 불완전한 흔적을 시각적으로 추론해 현실로 소환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Homer'
'Homer' ⓒJeong Jung-won
'Giuliano'
'Giuliano' ⓒJeong Jung-won

‘사진 vs 그림’ 논쟁을 부르는 하이퍼 리얼리즘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미지를 창조하며 동시에 그 허구성을 꿰뚫는 것이 진정한 묘미다. 또한 실제 인간의 시력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디테일을 충분히 확대해 보여줌으로써 낯섦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역할도 한다. 무엇보다 작가의 순수한 노동에서 느끼는 뭉클함과 경탄이야말로 현대 미술 작품이 너무 난해하거나, 혹은 간단해서 어떻게 감상을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는 관람객에게 하이퍼 리얼리즘이 꾸준히 사랑받는 비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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