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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정말 ‘공론’이었을까?

행정부는 공론화위원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신고리 5·6호기건설과 수능비율 확대를 결론내렸다.

ⓒhuffpost

신고리 5·6호기 계속 건설 여부와 대학입시제도 개선에 대한 결정이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적폐청산이나 소득주도성장 같은 이슈들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결코 그 의미가 적다고 할 수 없는 사안들이다.

 행정부는 공론화위원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신고리 5·6호기에 대해서는 계속 건설을, 대입제도에 대해서는 수능비율 확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안 모두에서 공약과는 사실상 반대되는 결정을 내린 셈인데, 청와대와 여당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로 중요한 공약을 툴툴 털어버렸다.

시민들이 중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론화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제도란 선한 의도만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수의 어떤 사람들이, 얼마의 기간 동안, 어떤 성격의 주제에 대해, 몇 가지의 선택지를 갖고, 어떤 방식의 토론을 거쳐서, 어떤 의사결정 방식을 통해, 어떤 종류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그런데 한국의 공론화위원회에는 이런 점들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seb_ra via Getty Images

 

 

우선 공론화위원회가 직접·참여민주주의의 한 유형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세계적으로는 물론 한국에서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공론화위원회가 ‘대표제 민주주의’의 한 형태라는 점에 동의한다. 이것이 직접민주주의라면 훨씬 많은 수의 시민들이 오랜 시간 동안 참여해야 하고, 이것이 참여민주주의라면 공론화위원회가 진행되는 동안 정치권과 언론, 시민사회단체들, 다수의 시민들이 왁자지껄하게 논의를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공론화위원회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종의 침묵이 강요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폐쇄적인 대표제 민주주의였다.

또한 두 사안에서 모두 전직 대법관들이 위원장을 맡았는데, 그분들이 사법적 판단의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시민패널을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이런 운영은 정부가 공론화위원회를 정치적 가치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분쟁의 사법적 화의나 조정, 행정적 절차의 일부분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많은 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사실은 이러하다. 평범한 시민들 중 통계적으로 샘플링된 극소수가 참여하는 공론화위원회에서 결정하기에 적절한 사안은, 몇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정책적 사안이 아니라, 한 사회가 나아가야 할 가치와 비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원칙들이며, 의사결정 방식은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에 가까운 합의나 최소한 3분의 2를 넘어서는 가중 다수결이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이 전력 산업에 대한 재검토와 입시제도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면, 공론화위원회에서는 원전 중심의 전력 구조를 유지할 것인지, 우리 입시제도가 우선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다양성인지, 획일성인지, 경쟁의 공정성인지를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건설 중인 원전의 지속 여부, 학종의 공정성에 대한 불안감, 수능 비율이나 절대평가 여부를 다루는 것은 공론화위원회가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행정부와 입법부의 일이며, 그것을 미루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책임회피일 뿐이다.

시민 수백 명이 며칠간 논의한 뒤 사전에 정해진 사지선다 중 하나를 다수결로 택하는 것이 공론을 정하는 방식이며, 이것이 촛불 이후의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크게 아쉽다. 국무총리는 공론화가 무익한 낭비가 아니며 이분법적 결론은 옳지 않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앞으로의 공론화는 과거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분명히 개선된 면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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