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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8월 18일 14시 38분 KST

페미니즘으로 문학을 다시 쓰면 이렇게 변한다

남성의 눈에서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본 세계

한겨레
문학계에서는 최근 ‘고전’이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을 여성주의 입장에서 다시 읽거나, 다시 풀어쓰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지난해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에서 ‘페미니즘으로 문학 읽기’라는 주제가 논의 됐고, 13일 출간된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민음사)는 페미니즘적 감수성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문학을 해석했다.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Littor)>는 8·9월호에서 아예 여성주의 시각에서 기존 작품을 비틀어 다시 썼다.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 이상의 ‘날개’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읽는다. ‘한국 대표 문학 작품’이라고 교과서에 나오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그 주인공들을 ‘식민지 시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지식인’ ‘가난에서 벗어나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안타까운 인력거꾼’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의 눈으로 다시 읽어본다면 다른 이야기가 보일지 모른다.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 속 첫 문장이다. 하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내의 눈에도 그는 과연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였을까. 소설가 이상이 1936년에 발표한 ‘날개’는 아무 일도 안 하는 ‘나’가 ‘기생’인 아내와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소설이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아내와 ‘나’의 기이한 관계를 통해서 근대 지식인들의 모순된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소설로 이상은 한국 현대문학 최초의 심리주의 작가로 일컬어지게 됐다.

소설 속 나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로 묘사되지만 ‘나’의 아내 입장에서 그를 보면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놈팽이 같은 놈, 아내가 내객과 있는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하고, 조석으로 닭이나 강아지처럼 주는 밥이나 받아먹고 있는 놈”(김보현, ‘미망기’)일 뿐이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가난과 울분을 묘파한 한국 초기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김첨지는 어떨까. “나가기만 하면 술 처먹고 들어오는 주제에, 제 새끼 한번 어를 줄 모르고, 제 새끼 배 채워 주는 나한테는 약 한 첩 쓰는 것도 아까워하는, 저 호로 자식 같은 놈!”(김이설, ‘운발 없는 생’)이다.

 

페미니즘으로 문학 다시 쓰기

문학계에서는 최근 ‘고전’이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을 여성주의 입장에서 다시 읽거나, 다시 풀어쓰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2016년 말 문단 내부의 성폭력 연쇄 고발 사태를 겪으면서 문단 안팎에서 여성주의 목소리가 커진 가운데, 일부 남성 문인들의 반여성적 언행에 대한 지적을 넘어 남성 작가 작품의 성의식 왜곡에 대한 비판으로 논의가 심화됐다.

지난해 2월 성균관대 국문학과가 열흘간 개최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강좌에는 매일 100명의 수강생이 참여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각종 문학 계간지에서도 ‘페미니즘으로 문학 읽기’의 흐름을 이어갔다. 지난해 <문예중앙> 봄호에서 강화길, 김엄지, 송승언 등 젊은 작가들이 유명 한국 소설 속 ‘여성비하·혐오’를 비판하고 나섰고, 이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서는 ‘페미니즘으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이라는 주제가,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서는 ‘페미니즘의 창으로 다시 읽는 한국 소설’이라는 주제가 논의됐다.

이런 논의들은 한국 문학사의 ‘명예’로 간주되던 작가들의 작품이 ‘문학적 권위’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돼 온 가부장적 지배질서의 지표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지난 13일 출간된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민음사)는 페미니즘적 감수성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문학을 해석했다. 민음사 관계자는 “‘이성애자-지식인-남성’ 중심적 기율이 지배해 온 창작과 해석의 영역으로 돌진해 여성과 소수자들의 문학을 발명하고 탈환하겠다”며 “더 이상 남성 중심적인 주류 문학사가 규정해 놓은 ‘문학’이나 ‘문학성’이라는 가치에 따라 독서하지 않겠다는 취지”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Littor)>는 8·9월호에서 아예 여성주의 시각에서 기존 작품을 비틀어 다시 썼다. 김이설 작가가 ‘운수 좋은 날’을 김첨지의 아내 입장에서 ‘운발 없는 생’으로, 김보현 작가가 ‘날개’ 주인공 화자의 아내 입장에서 ‘미망기’를 썼다.

‘운수 좋은 날’에서 인력거꾼 김첨지에게 아침부터 손님들이 줄을 잇는 ‘운수 좋은 날’이 찾아온다. 친구와 선술집에서 술을 마신 후, 아픈 아내가 먹고 싶다는 설렁탕을 한 그릇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내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이 작품은 당대의 사회 구조에서 하층민들이 직면하는 비참하고 비극적인 삶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작품 속 아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아내가 아픈데도 오랜만에 돈을 벌었다는 이유로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아내에게 욕설과 폭언도 일삼았다.

“나는 답답했다. 운이 왜 필요한가. 열심히 일하고 착실히 모아 어떻게든 살면 되지. 꼬박꼬박 하루 벌이의 절반이 넘게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주제에, 그마저도 벌이가 적은 날은 옴팡 다 쓰고 들어오기를 예사로 알고, 날씨 탓을 하며 나가지 않는 날이 달에 반은 넘었다. 배 곯고선 인력거를 못 끈다며 그마저 없는 세간살이를 팔아서라도 떡이든 곡주든 자기 배는 채우는 인간이었다.”(‘운발 없는 생’ 중)

‘날개’ 속의 ‘나’는 아내가 돈을 벌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데도, 어떤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이불 속에서 하루 종일 뒹구는 것 뿐이다. 일제강점기,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내에게 빌붙어 살 뿐이다.

“그는 평생 다르게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기생인 나와 부부 생활을 설계한 것 역시 그 필사의 노력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결국 복잡하게 뻔한 조선의 가장(家長)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뜻밖에도 그에 대한 모함이 되는 것일까? (중략) 병든 남편과의 생활을 유지해가기 위해 나는 낮이고 밤이고 내객을 들였다. 남편은 저 장지 너머에 숨어 여남은 살 아이처럼 내가 뭘 하는지 모르는 척했고, 나는 모르는 척 하는 남편을 모르는 척했다.” (‘미망기’ 중)

 

 

leszekglasner via Getty Images

 

 

김승옥·김동인 소설의 폭력성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상찬을 들으며 4·19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문학사에 올라있는 김승옥의 작품도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으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은 희생양이자 피해자로 등장하며, 이 또한 주인공의 ‘고백’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가해자인 남성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든다는 비판이 나온다.

강지윤 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은 “김승옥의 작품 속에서 여성은 사회로 나가려는 남성 주인공에게 장애물로 묘사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진기행’에서 하인숙은 자신을 서울에 데려가 줄 구원자에게 구애하고 있는 것이고, 윤희중은 탈출 욕망에 달뜬 나이 어린 여성을 성적·감정적으로 농락한 것뿐”이라며 “게다가 윤희중은 승진이 확정됐다는 아내의 전언을 받고 하인숙을 무진에 버려둔 채 결국 서울로 올라와 버린다”고 분석했다.

“김승옥 소설들은 남성 주인공들이 ‘순수한 세계’에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진입하는 길목에 여성이 걸림돌처럼 놓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남성연대의 세계에서 여성들은 성적 대상으로 환원되고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는 자본의 교환물이 될 뿐이라는 것을 남성 주인공들은 알고 있다.”

특히 김승옥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형태를 취한다. 강 연구원은 “김승옥 소설 남성 주인공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을 희생양 삼았다는 죄를 고백하는 주체라는 점”이라며 “역설적이게도 이 ‘고백하는 내면’이 그의 죄의식 자체에 독자들로 하여금 감정이입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자아낸다”고 말했다.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중 ‘감수성의 혁명과 반혁명’)

소설가 강화길도 김승옥 작품의 폭력성을 비판했다. 김승옥이 1962년 발표한 ‘건’에서 주인공 소년은 윤희 누나를 강간하는 형들의 모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강화길은 “가해자들은 여성을 강간함으로 해서, 타락을 성취하면서 주인공으로 남는다. 결말의 아름다운 비극 앞에서 이전의 폭력은 지워져 버린다. 그들의 타락에는 짓밟힌 여성의 목소리가 들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강화길은 ‘건’만이 아니라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생명연습’ 같은 김승옥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강간이 등장한다고 지적했다.

“김승옥 소설의 여성들은 자주 강간을 당한다. 놀라운 사실은 폭력과 타락의 감수성이 배가되면서 그로테스크한 도시의 풍경이 섬세하게 드러나는 반면, 피해자인 여성 인물들은 철저하게 지워진다는 것이다.”(<문예중앙> 2017 봄호 리뷰 중 ‘농담’)

김동인의 소설에서도 여성은 ‘예술’이란 명분 아래 희생당하고, 각종 범죄들도 예술이란 구실로 옹호된다. 김동인의 소설 ‘광화사’에서는 화가 솔거가 눈 먼 여자에게 사기와 살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 결과로 원하던 그림을 그리게 된다. 또 그의 소설 ‘광염소나타’에서 작곡가 백성수는 방화, 사체 모욕, 시간(屍姦),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를 통해 작곡의 영감을 얻고 음악비평가 케이도 그의 범죄를 예술을 구실로 옹호한다. 이에 관해 작가 김엄지는 “창작의 순간이 곧 범죄를 허용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들린다”며 “예술에 속해도 좋을 비윤리·범죄란 무엇일까”라고 되물었다.(<문예중앙> 2017 봄호 리뷰 중 ‘광기에 대한 환상’)

소설가 천희란은 ‘광화사’를 비틀어 쓴 ‘암굴의 살인’(<릿터>)에서, 눈 먼 여자에게 ‘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는 그녀가 순결을 잃자 아름다움마저 잃었다는 듯이 그녀를 추궁하고, 그녀를 목졸라 죽이고 말테죠. (중략) 그러나 그녀는 그의 못난 얼굴 대신 비뚤어진 마음을 보았어요. 여의 마음에 남아있던 마지막 빛을 꺼트린 건 솔거가 생각한 것과 달리 그와의 잠자리가 아니었어요. 수없이 버림받은 여에겐 그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게 무슨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고요.”

 

‘신여성’에 고착된 부정적 이미지

1920∼30년대의 ‘신여성’이라는 개념도 남성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대·재생산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당시 ‘신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던 가운데, 남성 작가들이 이를 작품 속에서 언급함으로써 신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더 활발하게 유통됐는 것이다. 심진경 서강대 교수는 “한국 근대문학이 ‘소문의 대상이었던 여성’에 관한 남성들의 수다에서 비롯됐고, 그 과정에서 ‘가정의 천사/사회의 악마’라는 이분화된 여성 표상은 지겹게도 지금까지 반복·재생산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염상섭의 ‘제야’가 신여성의 이미지를 굳힌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분석했다.

자유연애를 즐겼던 정인은 중매를 통해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남편은 정인을 용서한다고 편지를 보내지만, 정인은 자살을 결심하고 남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는 유서 형식의 편지를 쓴다. 심 교수는 “‘제야’는 신여성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하게 하려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당시 대중 담론에서 정형화된 신여성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했다”며 “자기 죄를 고백하는 주체는 여성이지만, 그 죄를 용서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는 남성이라는 사실은 신여성 재현의 한계”라고 지적했다.(<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중 ‘여성 문학의 탄생, 그 원초적 장면’)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을 기획한 오혜진 문화연구가는 “2015년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건을 시작으로,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최근 ‘미투 운동’까지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이 실망으로 변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 문학을 더이상 읽지 않겠다는 독자들도 생겨났다”며 “그럼에도 기존 작품들을 읽을 가치는 있다. 그 과정에서 한국 문학사에 어떤 것이 ‘좋은 문학’이고 ‘문학적인 것’인지,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감수성과 시각이 어떻게 배제됐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페미니즘 문학사가 아닌 페미니스트 시각이라는 점을 주목해달라”며 “이런 시도들은 젊은 독자들이 새롭게 장착한 문제 의식과 감수성으로 한국 문학사를 다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