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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과 재판부가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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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에 대한 1심 선고가 나왔다.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강제추행 5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등에 대해 재판부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업무상 상하관계에 있는 등 상호 지위상 위력관계인 점은 인정되나, 위력을 실제로 행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판단을 내리기에는 범죄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방청석에서 재판부가 판결문 요지를 읽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재판부의 판결문은 결심공판 당시 안희정 쪽 변호인단에서 주장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지난 7월27일 결심공판에서 안희정 쪽 변호인단은 다음 세 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피해자는 러시아 출장 중 최초의 업무상 위력 간음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그날 아침에도 순두부 등 안희정이 좋아하는 메뉴를 구해 오는 등 주어진 업무 이상으로 마음을 다해 일했으며, 둘째, 사건 이후에도 제3자에게 안희정에 대한 존경과 지지 의사를 표명했고, 셋째, 피해 후유증을 전혀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일상적 업무를 잘 수행했다는 것이다. 즉, 피해자답지 않게 피해 이후에도 성심성의껏 업무를 수행했다는 것이 안희정 쪽 변호인단의 주장이었다. 실소가 나왔다. 얼마나 궁색하면 저런 낡은 논리를 내세울까 싶었다.

연구 목적으로 재판 방청을 종종 하는데, 보통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쟁점은 위력관계를 상쇄할 만한 다른 관계성이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사장과 비서라 해도 연인일 수 있고, 정치인과 보좌관이라고 해도 섹스 파트너일 수 있다. 그래서 연인관계로 보이는 사진이나, 금전거래가 오간 흔적, 누가 먼저 만남을 어떤 방식으로 제안했는지 등을 두고 공방이 벌어진다. 하지만 안희정 사건에서는 그런 증거가 전혀 제출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안희정을 한번도 남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여러번 반복해서 흔들림 없이 진술했다.

위력이 행사된 정황 역시 충분하다. 공소가 제기된 총 10건의 사건 가운데 8건이 피해자가 근무를 시작한 두달 안에 이루어졌다. 최초의 위력 간음은 근무를 시작한 지 3주 만에 국외출장 중에 벌어졌다. 안희정은 유력 대선주자였고 피해자의 임면권자이며, 정치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피해자는 이곳에서 제일 중요한 건 평판 관리라는 말을 주변에서 계속 듣고 있었다.

결심공판에서 검사는 피해자의 진술에 매우 일관성이 있고 수많은 객관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 유죄 판단의 근거가 충분하다며 징역 4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에서 모순되거나 누락된 점이 발견되었으며,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범죄의 증명이 부족”하다며, “피해자가 명시적 동의를 표현한 적 없고 나름의 방식으로 거절했다 하더라도 현재 우리 성폭력 범죄 처벌 체계에서는 성폭력 범죄로 볼 수 없다”며 입법부로 공을 넘겼다.

안희정은 휴대폰을 끝까지 제출하지 않았고, 3월6일 페이스북에 자신의 입으로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자백했다. 진술을 바꾼 건 안희정이었고 증거를 인멸한 것도 안희정이었다. 재판부는 증거능력도 없는 가족이 피해자를 일방적으로 음해하도록 허용하고, 피해자에게 정조 운운하며 전근대적인 관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선고공판의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정조 관념은 이미 낡은 것이며 지금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시대라고 말을 바꾼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꾼 것은 누구인가. 증거를 인멸하고 무시한 것은 누구인가. 안희정과 재판부다. 그들이 유죄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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