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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SE 3회] 6·25 전쟁 직후, 한국 최초의 사회적 기업을 만든 아일랜드인이 있었다

故 맥그린치 임피제 신부와 성이시돌협회 ①

  • 박수진
  • 입력 2018.08.16 10:58
  • 수정 2018.08.20 10:01
ⓒhuffpost korea/sellev
제주 한림읍 내 성이시돌센터에 걸린 맥그린치 신부의 생전 모습. 옆으로 성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의 연혁이 적혀있다.
제주 한림읍 내 성이시돌센터에 걸린 맥그린치 신부의 생전 모습. 옆으로 성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의 연혁이 적혀있다. ⓒhuffpost/sujean park

제주도에서 가장 유명한 외국인은 아마도 아일랜드 출신의 임피제 신부(본명 패트릭 J. 맥그린치)일 것이다. 임피제 신부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20대 청년으로 제주에 와 지난 4월 선종하기까지 평생을 제주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다. 그는 척박한 제주 한림읍의 산을 개간하고, 육지에서 가축을 수입해와 목장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지역 경제’와 ‘사회적 경제’를 시작한 인물이다.

 

임피제 신부와 함께 해온 이들 중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를 떠나와 벌써 수십년째 제주에 살며 주민들과 어울려온 이어돈 신부(본명 마이클 리어던)가 있었다. 임피제 신부의 뒤를 이어 사단법인 성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이하 이시돌협회) 이사장을 맡아 목장, 호스피스, 요양원, 어린이집 등 지역 기반 사업들을 총괄하고 있는 그를 지난 7월 제주 한림읍 성이시돌센터에서 만났다.

 

1954년, 모든 일은 금융업에서 시작됐다

 

아일랜드를 떠난 스물다섯의 젊은 신부 패트릭 J. 맥그린치는 1953년 한국 부산에 첫 발을 딛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제주도로 부임지를 옮겼다. 한국전쟁과 4·3 사건으로 환경도, 사람들의 마음도 폐허에 가까웠던 제주는 섬 전체가 생활고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었다. 맥그린치, 한국 이름 임피제 신부는 제주도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사업을 하나씩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주민들을 위한 소규모 금융기관, 신용협동조합이었다.

 

“임피제 신부님이 처음 제주도에 왔을 때, 제주에서 일반 농민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개인한테 빌리다보니까 이자가 너무 높아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았고, 농민들이 빚 때문에 자살하는 사건까지 생겼어요. 그때 ‘사람들이 돈을 더 싸게 빌릴 수 있는 게 우선이겠다’고 생각하고 협동조합을 만드셨죠.” (이어돈 신부, 현 이시돌협회 이사장)

 

“저도 육지에서 온 사람이라고 처음에 좀 따돌림을 당했죠. 제주 사람, 한림 사람을 보증인으로 데려오라고 해서 대출을 못 받았어요. 저 같이 어려움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임피제 신부님이 수녀님들과 같이 제주도에 처음 신용협동조합을 개설하셨어요. 지금은 커졌지만, 작은 조직으로 돕는 게 처음 신협 이념이었죠.” (박용근, 1960년대 이시돌협회 개척 농가 농민)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려던 제주 주민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만큼 제주도에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진 무언가를 팔아야만 농사를 지을 자본, 심지어 당장의 생활비가 생기던 시절이었다. 기반이 없는 제주도의 청년들은 어부가 되거나 ‘육지 취업’을 떠났다. 이때 부산의 한 공장에 취업해 일하러 간 한 십대 여성이 원인 불명으로 사망해 주검으로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임피제 신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에 일자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왼쪽: 방직을 위해 키운 양떼 목장과 양돈 실습 모습, 오른쪽: 신용협동조합 창립 당시 찍은 사진.
왼쪽: 방직을 위해 키운 양떼 목장과 양돈 실습 모습, 오른쪽: 신용협동조합 창립 당시 찍은 사진. ⓒhuffpost/sujean park

 

1959년, 밖에서는 돼지를 치고 안에서는 옷을 만들었다

 

아일랜드 수녀들이 제주 주부들에게 방직 기술을 가르쳤고, 기술을 배운 주부들은 집에서 틈틈이 스웨터를 짜서 육지로 팔았다. 그렇게 1959년 한림수직이 설립됐다. 임피제 신부는 육지에서 돼지 한 마리를 수입해와 그 새끼를 키우고 주민들에 돼지 치는 법을 가르쳤다. 1961년 지금의 성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양, 돼지, 소를 키우는 목장 사업이 시작됐다.

 

“옛날 제주도 똥돼지는 팔려고 키운 게 아니었어요. 집 안에 잔치나, 장례식 같은 일이 생기면 자기 집이나 이웃집에서 한 마리 잡아서 그때그때 먹는 목적으로 키웠죠. 인분으로 키우니까 기생충 위험도 많았어요. 그런데 임피제 신부님이 주민들이 돼지고기 잘 먹는 걸 보고 이걸로 돈 벌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이어돈 신부)

 

“임 신부님이 ‘4H 클럽’(농촌 생활 향상을 목적으로 한 청소년 교육 단체)을 만들어서 아이들한테 사육 방법을 가르치고, 마지막에는 가축은행을 통해서 집마다 두 마리씩 분양을 해줬어요. 인분 먹이지 말고 꼭 배운대로 사료 먹여서 키우라는 조건, 그리고 돼지들이 다 커서 새끼를 치면 다시 두 마리씩 상환하라는 조건, 이렇게 두 가지 조건으로요. 6개월 뒤에 돼지가 크면 돈이 생길 테니까요.” (임건택, 이시돌협회 실장)

 

개척농가에서 돼지를 키우게 하려는 계획은 단 한 번 시도만에 접어야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집집마다 돼지들 살 찌우라고 옥수수를 배합한 좋은 사료를 줬는데 이상하게 몸무게가 늘지 않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 알아보니까 이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고 쪼들려서 이 사료를 체에 걸러서 옥수수를 죄다 팔아버린 거예요. 또 몇 개월 지나니까, 울고 오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해요. 학교 간 사이에 엄마 아빠가 돼지를 팔아버린 거죠. 돼지가 그 집 소유였지 교육 받은 아이들 소유는 아니었으니까. 그때 임 신부님이 ‘아차’ 싶었던 거죠. ‘내 실수다, 내가 그 사람들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 못 했구나.’ 그래서 돼지들은 다시 목장으로 거둬들이고. 실패이면서 성공이기도 한, 그런 경험이었죠.” (임건택, 이시돌협회 실장)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이시돌목장을 시찰하던 중 찍힌 임피제 신부의 모습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이시돌목장을 시찰하던 중 찍힌 임피제 신부의 모습 ⓒ국가기록원

 

1978년, 아일랜드에서 수의사 마이클이 왔다

 

성이시돌목장은 돼지와 양, 소의 두수를 늘려가며 발전을 거듭했다. 목장이 커지면서 주민들의 일자리도 늘어났고, 협회도 늘어난 목장 수입 덕에 지역 주민을 위한 병원 등의 복지시설을 운영해갈 수 있었다. 그러던 1977년, 아일랜드에서는 수의사 한 명을 제주도에 보낼 계획이 진행됐다.

 

“수의학과를 졸업할 때는 영국에 가려고 했었어요. 취업 추천서를 받으려는데 학장님이 ‘한국에 있는 신부님이 수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면서 ‘가보면 어떠냐, 가면 돈은 많이 못 받을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혹시 성적에 영향 있을까봐 ‘돈 상관 없고 좋은 일 하고 싶다’고 적당히 대답했어요. 좋은 일 하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한국에 갈 생각은 없었죠. 그랬는데 얼마 안 있어서 NGO에서 연락 오고, 제주도에 있는 임피제 신부님한테서 ‘수의사가 오면 너무 좋겠다’고 편지가 온 거예요. 그땐 취소하겠다고 얘기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한국에 가기로 정해지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빨리 가고 싶었어요. 부모님도 반대하고,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가는데도 이상하게 ‘가보자’ 싶더라고요. 사실 그때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전쟁 끝났으니까 가도 되겠다는 생각은 했죠. 사실 아직 안 끝났지만.” (이어돈 신부)

 

아일랜드를 출발해 런던, 모스크바, 도쿄, 서울을 거쳐 며칠 만에 제주에 도착했다. 1978년, 마이클 리어던, 한국 이름 이어돈 신부가 스물네살 때의 일이다.

 

“제주도 처음 왔을 땐 건물이 다 창고 같았어요. 게다가 모기 물리고, 뱀 물리고. 문화충격도 많이 겪었어요. 한번은 밤에 동네 사람이 소가 아프니까 와서 치료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가보니까 사람들이 모여있고, 소가 옆에 누워있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소한테 갔어요. 소부터 빨리 치료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누군가 저 보고 ‘야 이 무식한 놈아 주인한테 먼저 인사를 해야지 소한테 가냐’고 하는 거예요. 한국문화에서는 소보다 주인한테 먼저 인사해야 하는 거라서, 그때 좀 충격 받았어요.”

 

예정됐던 2년이 지나고도 “다음 명절까지만 있겠다”며 조금씩 체류 기간을 늘렸지만, 동생의 결혼식 참석을 계기로 결국 2년반 만에 한국을 떠났다. 그런데 아일랜드에 돌아간 후, 그는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됐다.

 

“신부가 되는 게 한국에 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원래는 신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수의학과 동창들도 ‘어떻게 너 같은 놈이 신부 됐냐’고 농담할 정도로. 떠날 때는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슬펐는데, 결국 왔고 지금까지 30년 넘게 잘 살았어요.”

 

1986년에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후 서울과 제주를 오가다 2000년대 초 제주에 정착했다. 2011년에는 임피제 신부의 뒤를 이어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의 이사장이 됐다.

 

“임 신부님하고 저를 비교하면 안 돼요. 임 신부님은 진짜 엄청난 일 했잖아요. 난 후임자일 뿐인데, 그 분과 비교하면 난 아무것도 못했어요. 임 신부님한테 진짜 많이 배웠어요.”

 

지난 4월 23일 선종 후 제주 한림성당에 마련됐던 故 맥그린치 임피제 신부의 빈소
지난 4월 23일 선종 후 제주 한림성당에 마련됐던 故 맥그린치 임피제 신부의 빈소 ⓒNews1

 

 

″고인께서는 4.3사건과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제주도에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이시돌 목장을 설립하여 제주의 가난을 떨쳐내고자 하셨고, 병원, 요양원, 유치원 등 복지시설과 신용협동조합을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 (중략) ...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포용, 나눔의 메시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이어가겠습니다. 故 맥그린치 임피제 신부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 2018년 4월 24일 故 임피제 신부에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전 중에서.

 

이시돌협회 이사장을 맡은 지 8년째인 이어돈 신부는 ”그동안 협회가 아직 안 망하고 더 발전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한국에 산지 30년 넘었지만 지금도 재미있는 일이 거의 매일 있어요. 그래서 살기 좋아요. 오래 살았어도 한국말 다 한다고 할 수 없고, 한국문화 다 이해한다고 할 수 없잖아요. 매일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어서 재미있어요. 여기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신부님, 한 잔 하자. 식사하자.’”

 

*[RISE 3회] “앞으로도 이 돈 다 쓸 겁니다” ‘사업하는 아일랜드 신부’ 이어돈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

 

허프포스트코리아와 뉴미디어 플랫폼 셀레브(sellev.)의 공동 프로젝트 ‘라이즈(RISE by huff x sellev.)’는 혼자가 아닌, 세상과 함께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RISE 순서

1회. 발달장애인들도 ‘남들’처럼 직장을 다닐 수 있다면?: 발달장애인 고용이 목표인 사회적기업 ‘베어베터’의 두 대표 이야기 (인터뷰 기사 보기)

2회. ”쇼핑 카테고리만 하나 만들어도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온라인쇼핑 플랫폼을 활용해 공익을 위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이베이코리아의 이야기 (인터뷰 기사 보기)

3회. 제주도 사람들과 수십년 동안 인연을 맺고 있는 아일랜드 출신 신부(神父)들: 성이시돌협회 임피제·이어돈 신부의 이야기

 

 

RISE 3회. 제주 성이시돌협회 임피제·이어돈 신부 편

대담/ 김지현(sellev.)

정리/ 박수진

촬영/ 김한솔(sellev.), 강한(sellev.), 이윤섭

영상 구성, 편집/ 강한(sellev.), 김지현(sell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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