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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8월 13일 13시 46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8월 13일 13시 47분 KST

총체적 파국을 넘어서

뉴스1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6월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재판거래 의혹' 관련 입장을 발표 전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huffpost

9년 전 나는 한국연구재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전문가 심사에서 1위로 평가받은 연구과제가 최종심사에서 부당하게 탈락했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 제일 먼저 ‘교수시국선언’을 발표한 것이 화근이었다. 2년에 걸친 재판에서 패소 판결을 받고 나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양승태 사법부의 추악한 모습을 보며, 이제야 그 판결을 이해하게 되었다. 법원이 권력에 의해 짓밟힌 정의를 다시 세우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순진한 환상이었는지 깨달았다. 법관이 정의의 준칙이 아니라, 권력의 입맛에 맞추어 판결한다는 것을, 심지어 조직의 이해를 위해서는 권력과의 ‘거래’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양승태 사법부가 확실히 깨우쳐주었다.

어디 사법부뿐이랴. 둘러보면 온 천지가 전도된 세상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민을 적으로 몰아 쿠데타를 모의하고, 공정한 경제 질서를 세워야 할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 기업과 퇴직 후 일자리를 뒷거래하고, 국민을 대신해 주요기관을 감독해야 할 국회의원이 피감기관의 돈을 받아 외유를 다니는 세상이다. 하긴 촛불혁명의 후예를 자처하는 정부의 대통령과 장관이 국정농단 재판을 앞둔 재벌 총수에게 투자를 구걸하는 판국이니 나라의 기강이 제대로 서겠는가. 가히 총체적 파국의 국면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국가 기관의 단순한 부패가 아니라, 전면적 자기부정이다. 법원이 정의를 부정하고, 군대가 국민의 안전을 부정하고, 공정위가 공정성을 부정하고, 국회가 민의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국가를 떠받치는 법원, 군대, 국회, 정부 기관이 스스로를 부정하며 붕괴하는 총체적 파국의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비상한 국면을 비상한 각오로 극복해야 한다. 대법원, 기무사, 공정위, 국회에 대해서는 국헌문란의 차원에서 엄격하게 수사하고, 단호하게 징벌해야 한다. 특히 특활비나 선거제도 개혁 문제에서 혁신의 기수는커녕 수구의 화신으로 퇴행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에 대해서는 엄중 경고하고 근본적 쇄신을 요구해야 한다.

단기적 조치와 함께 장기적인 비전도 가다듬어야 한다. 총체적 파국에 대한 ‘근원치료’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개혁이 절실하다. 이는 한가한 교육입국론이 아니다. 잘못된 교육으로 인한 엘리트들의 집단 이기주의와 공적 책임의식의 부재는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양승태 사법부가 보여준 것은 법원의 타락을 넘어, 교육의 파탄이다. 사법부는 한국 교육이 길러낸 ‘우등생들의 집합소’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법관들의 순응주의, 자기검열, 권위주의, 반지성주의, 특권의식, 기회주의는 한국 교육이 각인한 성격 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의 교육이 지속되는 한 ‘양승태 체제’도 지속될 것이다.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을 경쟁과 우열, 승자독식의 원리에서 교감과 평등, 연대의 원리로 전환하지 않는 한 한국 사회는 오만하고 이기적인 엘리트들이 대중을 깔보며 자신들의 특권 수호에만 매진하는 엘리트 특권 사회로 굳어져 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육부는 교육 문제를 단지 입시 문제로 보며 경쟁을 부추기고 있으니, 그 무능과 단견에 절망할 뿐이다.

총체적 파국의 책임은 물론 문재인 정부의 몫은 아니다. 그러나 총체적 파국을 타개할 책임은 현 정부의 몫일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정부라는 자의식을 되살려 총체적 파국의 현실을 근본적 변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