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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이란 말에 숨은 비겁함, 동일범죄·동일처벌 모자이크

  • 이승한
  • 입력 2018.08.12 11:51
  • 수정 2018.08.12 20:38
ⓒhuffpost

어머니가 해주시던 맛 그대로라며 즐거워하던 탤런트 김영철에게, 콩나물비빔밥집 사장님은 솥 바닥을 긁어 거대 누룽지를 뜯어주었다. 귀한 손님인데 따로 줄 건 없으니 이거라도 들고 가라며 김영철의 손에 누룽지를 들려주는 사장님의 눈에는 언뜻 눈물이 비쳤다. 이게 뭐라고, 가게를 나선 김영철도 눈가가 그렁그렁하다. <한국방송>(KBS)이 파일럿으로 선보인 다큐멘터리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의 한 장면이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인 서울 중구 중림동과 만리동 골목을 걸어 다니던 김영철에게, 어머니가 해주시던 추억의 음식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맛집의 존재와 사장님의 온정이 꽤나 감동이었던 모양이다.

입소문이 좋았던 프로그램이라 기대하며 보던 내 표정이 굳어졌던 게 그 대목이었다. 안 그래도 자꾸 어머니를 강조하며 중림동과 만리동의 아름다움을 ‘어머니 품처럼 따스한 동네’라고 설명하는 내레이션이 거북했던 차였다. 장성한 아들들이 어머니를 기리는 효심도 그 정도가 과하면 “자식을 위해 희생하시던 그 시절 우리네 어머니”라는 이상향과 “희생할 줄 모르는 무정한 요즘 엄마들”이라는 이분법으로 돌변해 요즘 여성들을 후려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 광경을 하루이틀 본 게 아니니, 김영철의 진심에 흔쾌히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시절을 추억할 만한 정서가 어머니 은혜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정서만 집중해서 부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만 그렇게 본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자, 개중 한명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누룽지 뜯어주는 장면 말이야. 여자들은 그런 거 보면 좀 싸해. 보통 그런 누룽지는 아버지 아니면 아들 몫이지, 옆에서 밥 짓는 거 도와줬던 딸한테는 절대 주는 법이 없거든.” 같은 장면을 보고도 누군가는 ‘어머니처럼 정겨운 그 시절 그 동네’를 떠올리며 웃는가 하면, 다른 이는 모성애 만만세를 외치는 프로파간다를 읽으며 불편해하고, 또 누군가는 그 모성애조차 일단 아들한테 먼저 돌아가는 불평등을 읽는다. 물론 제작진은 감동을 전하고자 하는 선의 말고는 딱히 다른 의도가 없었을 테지만,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방송은 여전히 시청자의 머리에 모성애 신화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꾹꾹 눌러 담아준다.

ⓒKBS

당대의 고정관념에 저항하면 ‘정치적’

글이나 방송에 담기는 정치적 입장이라는 게 그렇다. 아무리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 ‘정치’가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일 때면 그 이야기는 정치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한 신용카드 회사가 광고 카피로 밀었던 문장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를 살펴보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 문장을 읽으며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을 위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한다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니까, 그 문장이 정치적이라고 느낄 틈도 없이 훈훈한 덕담으로 받아들였던 게다. 그런데 그 옆에다가 “부자가 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라는 문장을 적어보자. 당장 불온해 보인다. 혹시 사회주의자세요? 아뇨, 하지만 부자가 아니더라도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도록 복지를 확충하고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요? 흠, 정치적이시네요. 보라. 당대의 고정관념이나 인습에 저항하는 말이 나왔을 때, 그제야 사람들은 말 속에 담긴 정치적 입장을 발견한다.

토크쇼를 보다 보면 종종 나오는 장면 중 이런 게 있다. 말투나 손짓 따위가 섬세하고 부드러운 남자 연예인에게 진행자가 대뜸 “성 정체성이 의심된다”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던지면, 그 말을 또 위트 있게 받는답시고 이렇게 답한다. “저 신체 건강한 남성입니다.” 이성애를 ‘신체 건강’이라고 표현한다는 게 뭘 의미하는고 하니, 이성애를 제외한 다른 모든 성 정체성은 ‘신체’가 ‘건강’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쉽게 말해 “나 정상, 나머지는 비정상”이란 말씀 되시겠다. 이 어마어마한 혐오 표현은 농담의 탈을 쓰고 십수년간 유통됐는데, 이런 말이 문제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한 건 불과 몇년 안 됐다. 이성애가 정상이고 나머지는 비정상이라는 이성애 중심주의가 한국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으니,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이게 대단한 혐오 발언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것이다.

채널을 돌려보자. 여자 아이돌 가수의 체중을 재면서 프로필에 적어둔 체중보다 높게 나오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인 방송들이 줄을 잇는다. 물론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도 누가 비판적인 어조로 물어보면 정색을 하며 “여성 아이돌을 상품화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으리라. 젊은 여성의 육체를 재단해 파는 이데올로기가 공기처럼 퍼진 세상에 살다 보면, 그런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테니까.

요컨대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아무리 반복해서 재생산해도 좀처럼 티가 나지 않는다. 압구정을 지나가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열차를 타보자. 객차 안이 온갖 성형외과 광고로 가득하다. 신체 부위별로 집요하게 수술을 제안하는 이 광고들은 여체의 이상향을 결정하는 기준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허리는 잘록해야 하고 가슴은 물방울 모양으로 볼륨이 있어야 하며, 이마는 도톰하고 콧날은 날렵해야 하는데, 자신들이 이마에 지방을 주입하고 코를 버선코로 만드는 수술을 패키지로 묶어 얼굴에 S라인을 만들어주는 원스톱 수술을 개발했다고 떠들어대는 광고들. 자신들이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미의 기준이라 외치는 3호선 객차의 광고판은 소리 없이도 시끄럽다. 노출 심한 여성 캐릭터가 유혹하듯 손짓하는 모바일 게임 광고들은 어떤가? 남성 게이머들에게 퀘스트에 대한 보상이자 판타지로 여성의 육체가 제시되는 건, 여성을 대상화하고 물신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이 아니고 뭔가?

이런 광고들을 멀쩡하게 게재하며 수익을 내던 서울교통공사는, 축제 기간 급증하는 외부인의 성폭력에 맞서 “허락 없이 몸에 손대지 말 것/몰래 촬영하지 말 것/무리하게 번호 요구하지 말 것/함부로 건물 내부에 들어가지 말 것” 등을 당부한 숙명여자대학교 학생들의 광고를 거절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정치적 메시지가 게재되면 항의 민원이 많이 들어와 업무에 지장이 생긴다는 게 이유였다. 여성의 육체를 재단하고 여성을 물신화하는 광고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일부라 그 정치성을 못 느끼던 사람들이, 여성이 자기 결정권을 선언하는 의견광고를 낸다고 하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정치적 메시지”라 외친다. 주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을 ‘정치적’이라는 핑계로 틀어 막다 보니, 결국 한국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만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결국 시민들의 항의에 서울교통공사도 “개인이나 단체의 주장 또는 성·정치·종교·이념의 메시지가 담긴 ‘의견광고’는 게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방향을 선회해야 했다.

‘정치적’ 핑계로 입 막는 저열한 정치

우리는 ‘정치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발언’을 반박하며 토론을 시작할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은 발언’을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정치적 발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입을 막을 수는 없다. 모든 발언은 결국 어떤 입장이든 제 나름의 정치적 입장을 띨 수밖에 없으니까. ‘정치적’이란 이유로 입을 막는 거야말로, 정치혐오를 이용해 변화를 거부하고 체제의 현 상태만을 수호하는 가장 저열한 형태의 정치다. 최근 한국방송 퀴즈쇼 <도전! 골든벨>은, 참가 학생 중 한명이 자신의 화이트보드에 적은 ‘동일범죄, 동일처벌’ 문구를 모자이크 처리해 방송했다가 논란을 빚었다. “첨예하게 주장이 엇갈리는 정치적·종교적·문화적 이슈의 경우, 한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방송할 수 없다”는 게 제작진이 밝힌 이유다. “청소년들이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면서, 그 의견이 정치적 진공상태에 놓여 있기를 바라는 비겁함이라니. 지금 국민의 수신료를 받아 가장 저열한 정치를 하고 있는 건 누구인가?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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