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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은 '좀도둑 가족'의 활기를 전하지 못한다

 영화  '어느 가족' 스틸 이미지
 영화  '어느 가족' 스틸 이미지
ⓒhuffpost

사람살이의 모양새는 역사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변하지만, 그 핵심 DNA 는 별반 다르지 않다. 가족은 그 중 하나다. 그러니 수많은 문학과 영화가 가족 이야기를 한다. 가족관계에서 벌어지는 애증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때로는 놀랍다. 이 진부하고 시시하고 다 알 것 같은 가족 이야기가 그렇게도 되풀이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경우에도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2018년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원제는 ‘좀도둑 가족’이란 뜻의 万引き家族)을 보기 전 이 이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을 들었다. 그런 말들을 들으며 내가 가졌던 마음은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양가적인 감정이었다. 

먼저 우려. 그동안 여러번에 걸쳐 ‘가족‘의 이야기를 압도적으로 다뤄온 감독이 과연 일견 진부해보이는 소재를 갖고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혹시 전에 했던 이야기의 반복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기대. 하지만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역량으로는 당대 최고라 할 만한 고레에다 감독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번에도 뭔가 다른 얘기를 하지 않을까라는 기대. 결론부터 당겨 말하자. 내가 가졌던 우려를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역시 ‘고레에다 감독이구나’ 싶은 만족감을 채워준 영화다. 

현대가족의 기본적 형태는 부르주아적 ‘혈연‘관계‘에 근거한다. 피로 맺어진 관계의 끈끈함과 지겨움. 영화는 그런 ‘피의 순수성‘에 근거한 가족관념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물론 감독의 이전 영화들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도 그런 물음이 이미 제기된 바 있으나 이번 영화에서는 그 물음이 더 날카로워지고 확장된다. 그러므로 영화는 그답게 따뜻하면서도 서늘하다. 이 문장은 모순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이제는 ‘감동‘이라는 말도 케케묵은 상투어가 되었지만 때로 어떤 영화나 문학작품은 그런 말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영화도 그렇다. 몇개의 키워드로 내가 받은 ‘감동’의 이유를 적어보지만, 이런 영화에 대해서는 결국 한마디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냥 가서 보시라. 

먼저 가족. 이런 가족이 있다. 이들의 관계를 통상적인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그렇게 부르자. 영화는 뒤로 갈수록 이들이 맺는 가족관계가 통상적인 것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이들은 가족인가, 아닌가. 가족이 아니라면 이들은 무엇인가. 가부장이라고 하기 어려운 남자가 있다. 오사무(릴리 프랭키). 그는 ‘좀도둑‘질로 생활용품을 훔쳐오고 일용직 노동일을 한다. 그리고 ”집에서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 학교‘라고 믿는 아이 쇼타에게 좀도둑질을 가르친다. 영화의 첫장면은 둘이 ‘합’을 이뤄 성공하는 도둑질을 보여준다. 대단한 것도 아닌 좀도둑질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들이 하는 ‘도둑질‘이 거창한 게획을 세워 ‘한탕질‘을 하는 하이스트 필름(Heist film)’ 이나 케이퍼 영화(Caper movie)와는 전혀 전해주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 오사무나 쇼타에게, 그리고 그의 아내인 노부요(안도 사쿠라)나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에게 좀도둑질은 생계와 생활을 위한 범상한 생활의 수단이다.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렇게 인식된다. ‘유괴‘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통상적인 사회적 관념과는 다른 삶을 산다. 그 간극이 결국 비극을 낳지만. 그래서 묻게 된다.이들이 하는 좀도둑질이나 ‘유괴‘가 ‘좋다‘는 뜻인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는 뜻인가. 영화에서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하지는 않지만 두개의 대사가 약간의 힌트를 제공한다. 좀도둑질은 ’ 가게가 망하지 않을 정도로 하면 되지 않을까′ 라는 말로 정리된다. 이들에게 그들이 맺는 이상한 ‘가족‘관계는 ‘남이 버린 것을 주운 것이다.’ 그렇다면 버린 자들은 누구이고(유리는 그 사례이다), 주운 자들은 누구인가. 버림과 주움의 주체와 기준은 무엇인가. 영화가 묻는 무거운 질문이다. 영화는 이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만은 않게 전달한다. 

 영화  '어느 가족' 스틸 이미지
 영화  '어느 가족' 스틸 이미지

계급과 감상주의. 영화의 중요인물들 모두는 사회적으로 하층계급이다. 정확히 말하면 최하층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서있는 이들이다. 이들의 좀도둑질이나 돈에 대한 태도를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누가 말했듯이 관용과 여유는 부르주아의 특권이다. 일용노동자인 오사무,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데려온(하지만 결국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유괴로 판결되는) 유리/쥬리(사사키 미유)를 지키기 위해 직장에서 잘리는 노부요. 죽은 전남편의 연금(월 6만엔)으로 생활하는 하츠에, 유사 성행위 업소에서 일하는 아키(마츠오카 마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어린아이 쇼타(죠 카이리),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정 폭력으로 고통받는 유리 등. 모두가 사회적 주변계급의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을 묘사할 때 종종 빠지는 오류. 이들을 이상화하거나(민중주의적 시각) 혹은 무시하거나(엘리트주의적/ 온정주의적 시각) 하는 것이다. 그 둘 모두는 종종 감상주의(sentimentalism)로 귀결된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외부의 힘들에 맞서 가족간의 유대를 확인하는 것. 그렇게 감상주의는 케케묵은 가족주의로 귀결된다. ‘만비키 가족‘의 매력은 이런 여러 ‘주의‘들에 대해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내가 굳이 ‘아슬아슬‘하게 라는 말을 쓴 이유는 그만큼 감상주의나 ‘가족(주의)’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런 감상주의, 가족주의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뜻하게, 서늘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묻는다. 도대체 가족은 무엇인가. 

영화 막바지에서 노부요가 던지는 질문이 그래서 서늘하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엄마가 되나요?’ 그래서 ‘쇼타와 유리에게 당신은 누구였는가‘라는 심문관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노부요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오래 응시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한다. 때로 좋은 문학작품의 어떤 장면은 어떤 영화적 장면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경우가 있다. 문학적 묘사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다. 그러나 그 반대 경우도 있다. 영화에서 노부요가 짓는 그 표정을 어떤 문학적 묘사로 대체할 수 있을까. 이럴 때 좋은 영화와 좋은 배우의 힘(연기력)을 실감한다. 혼자말로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하츠에의 표정이나 역시 오사무와 헤어지면서 혼자말로 ‘아빠’를 말하는 쇼타의 표정도 그런 영화적 표현의 예들이다. 좋은 작품은 줄거리나 이야기 구성만이 아니라 이런 디테일, 숏에서 힘을 발휘한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제한된 시간 안에 다양한 ‘가족‘의 이야기를 배치하는 관계로 각 인물들의 내면과 사연이 온당하게 표현되지 못한 느낌도 든다. 이렇게 적긴 하지만 심각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트집이자 아쉬움이다. 하츠에는 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적지 못하지만) 굳이 아키와 같이 살려고 했을까. 아키의 의심대로 정말 ‘돈’ 때문이었을까. 혹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전 남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오사무와 노부요는 어떻게 만난 것일까. 그들이 과거에 했다는 그 ‘행위’(역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이들의 지금 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말대로 무관한 것일까. 아키는 왜 집을 떠난 것일까. 그녀의 부모는 왜 자신들의 딸에 대해 거짓말을 할까. 하츠에의 죽음 이후 아키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쇼타도 버려진 아이였을까. 

많은 질문이 제기되지만 영화는 뾰족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침묵은 어쩌면 당연하다. 누구도 이 질문들에 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삶에서는 명확한 답변이 주어지는 경우보다는 이 영화가 보여주듯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어떤 평자들은 이런 서사의 구멍을 비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구멍 혹은 여백들이 삶과 생활앞에서 최대한 감상주의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냉철함, 하지만 따뜻함을 잃지 않은 서늘한 시선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여백을 옹호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도 영화의 제목을 원제인 ‘좀도둑 가족‘에서 ‘어느 가족‘으로 바꾼 것은 유감이다. 영화의 이 가족은 단지 ‘어느 가족‘이 아니다. 이들은 매우 특별한 ‘좀도둑’ 가족이다. 아니, 가족이라고 섣불리 단정하기도 힘든 사람들이다. 바뀐 제목은 그 특별함을 가려버린다. 이 영화의 ‘활기’를 전하지 못한다.

고레아다 감독을 두고 영화의 형식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 심혈을 기울이는 스타일리스트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 가족이 사는 집/공간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나 세세한 디테일들은 감독의 전작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집/공간’이 그렇듯이 또 하나의 중요배역같은 역할을 한다.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좋지만 안도 사쿠라의 연기, 특히 영화 후반부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압권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좋은 배우는 표정과 몸짓으로 어떤 문자예술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한다. 

다른 나라 영화와 한국영화를 단순비교하는 건 늘 조심스럽다. 그리고 당연히 신중해야 한다. 고레에다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한 관객으로서 나는 이만한 ‘가족’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한국영화의 어떤 공백을 생각한다. 한국영화의 실상에 문외한인 문학평론가로서 하는 조심스러운 판단이지만 한국의 가족영화는 양과 질 모두에서 아쉬움이 적지 않다. 뭔가 ‘세고 화끈한’ 영화가 아니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가끔씨 나오는 ‘가족’ 영화들은 진부한 신파적 감상주의 혹은 가족주의에 갇혀 있다.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어떤 얘기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능히 짐작된다. 감상이나 신파는 힘이 세지만 감상이나 신파로 좋은 영화를 만들기는 어렵다. 좋은 영화는 좋은 문학이 그렇듯이 뻔해 보이는 제재와 소재를 갖고 관객과 독자가 갖고 있는 기대치를 돌파하고 넘어선다. 그때 필요한 것은 냉철한 시선일 것이다. 그 시선에 고레에다의 영화가 보여주는 따뜻함과 활기라는 요소가 더해진다면 더 좋을 것이고. 

이 영화가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극장가에서 이런 영화를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는 건 유감이다. 한두편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상영관을 거의 독점한다. 예술이자 ‘산업/비지니스’의 성격이 문학보다 훨씬 더 강한 영화매체의 특징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관객은 좋은 영화를 더 많이 볼 권리가 있다. 특정영화의 독과점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어렵게 예매를 해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씁쓸한 후기다. 

이 영화 극장에서 꼭 보시라. 강력 추천한다.

*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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