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18년 08월 07일 15시 26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8월 07일 15시 31분 KST

이탈리아 '반기득권 정부'가 아동 백신 접종 의무화 법안을 뒤집다

이것은 위험한 반(反)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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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상원이 아동 및 청소년의 백신 의무접종을 유예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가 과학을 무시하고 질병 확산 위험을 높였다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지방 정부들은 헌법소원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7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탈리아 상원은 17세 이하 아동 및 청소년이 공립학교에 입학하려면 10가지 백신 주사 접종 증명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한 규정을 유예하는 법안(개정안)을 찬성 148표, 반대 110표로 통과시켰다. 

이탈리아는 홍역이 크게 유행하자 지난해 20년 만에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제정해 올해 3월부터 시행했다. 그러나 반기득권 정당을 표방하는 ‘오성운동’과 연정 파트너 ‘레가당’은 지난 3월 선거운동 당시 백신 의무화 폐지를 적극적으로 공약한 바 있다.

오성운동 소속인 줄리아 그릴로 보건장관은 백신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면서도 현재의 규제가 너무 엄격하다고 주장했다. 레가당 대표이자 부총리 겸 내무장관인 마테오 살비니는 의무접종 대상이 된 10가지 백신들이 ”소용없고 위험할 때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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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운동 소속 보건장관 줄리아 그릴로.

 

3월 총선 이후 연립정부를 꾸려 집권한 오성운동· 레가당은 이미 지난달 백신 의무접종 규정을 일부 완화했다. 의사가 발급하는 접종 증명서가 아니더라도 ‘예방접종 규정을 준수했다’는 내용의 서류를 부모가 작성해 제출하도록 한 것. 이번에 상원을 통과한 개정안은 일체의 접종 증명서 제출 의무를 유예하는 내용이다. 

이번 개정안이 시행되려면 하원의 검토와 의결을 거쳐야 한다. 만약 하원에서도 통과되면 학부모들이 백신 접종 증명서를 학교에 제출하도록 한 규정이 내년 학기까지 유예된다. 연립정부는 그 전까지 의무접종 규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새 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탈리아 의사협회 회장 필리포 아넬리는 의회가 ”과학을 존중해야 한다”고 비판했으며  피에몬트주 보건과장 안토니오 새타는 의회의 이번 결정이 핵심 공공보건 이슈에 대한 합의를 ”후퇴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9개 지방정부는 정부의 백신 의무접종 폐지 움직임에 반발하며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한편,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는 자체 법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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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의무접종 법안 시행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의 모습. 로마, 이탈리아. 2017년 9월10일.

 

지난달 가디언이 보도한 내용을 보면 지난해 이탈리아에서는 전염성 질병인 홍역 발생건수가 5000여건에 달했다. 유럽에서 루마니아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올해는 1700여건이 발생해 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된다.

밀란에 위치한 산 라파엘레 건강보건대학의 미생물·바이러스학 교수 로베르토 부리오니는 ”불행하게도 이탈리아의 홍역 예방 수준은 나미비아와 비슷하다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 오는 사람들은 홍역에 걸릴 위험에 놓여있는 것이다.”

오성운동의 설립자인 코미디언 출신 베페 그릴로는 백신이 ‘위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오성운동은 2015년 ”백혈병, 식중독, 염증, 면역억제, 유전성 유전자 돌연변이, 암, 자폐증, 알레르기 같은 질병과 백신의 연관성”을 거론하며 백신 의무접종을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미국, 한국 등 여러 국가에서도 비과학적인 믿음 때문에 자녀의 백신 접종을 꺼리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경제규모를 기준으로 세계 10위권인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 정부가 백신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015년 백신 접종 기피 때문에 매년 150만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