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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민국과 불쌍한 닭들의 행성

ⓒJamie McDonald via Getty Images
ⓒhuffpost

처음 먹었던 양념치킨은 1989년 외숙모가 사줬다. 입속 세상이 천지개벽했다. 세상에 없던 맛이었다. 돌이켜보면, 한국 치킨 산업의 맹아가 싹트던 시대였다. 1977년 서울 명동에서 국내 최초의 치킨 체인 ‘림스치킨’이 문을 열긴 했지만, 본격적인 맛의 경쟁 시대가 열리진 않았다. 페리카나, 멕시카나, 처갓집치킨이 양념치킨을 내놓은 198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한국의 치킨 산업이 열렸다.

외숙모는 결혼 전 어른들에게 인사드리기 전 조카를 양념치킨으로 꼬드겨 우군을 만든 것이었다. 치킨은 귀했다. 졸업식 오후에나 맛보거나,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가 들고 오는 음식이었다.

그때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치킨은 ‘후라이드’와 새로 도전장을 내민 양념치킨뿐이었다. BBQ, BHC, 교촌 등 지금의 치킨 브랜드가 나타났고, 저마다 특색 있는 치킨을 개발해 내놓았다. 크리스피한 튀김옷과 풍부한 육즙이 장점인 ‘황금올리브치킨’, 단맛과 짭조름한 맛의 리듬이 일품인 ‘허니오리지널’, 가루 치킨계의 레전드 ‘뿌링클’ 등 젊은이들은 맛을 비교할 줄 안다. 우리는 지금 ‘치킨민국’을 살고 있다.

치킨 맛의 발전을 추동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쉴 새 없이 진행된 기술혁신이다. 닭고기를 어떻게 소금에 재우느냐(염지), 튀김옷을 어떻게 입히느냐, 그리고 어떤 소스를 만드느냐를 두고 각 업체 연구팀은 밤을 새운다. 농업사회학자 정은정은 <대한민국 치킨전>에서 치킨 산업이 완전경쟁 시장에 가깝다고 분석한다. 치킨업계의 선두주자 비비큐도 시장 점유율 10%대밖에 안 되니, 독과점이 없는 곳이다. 판가름은 입소문에서 난다. 세 가지 실력으로 입안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끊이지 않고 배출되는 치킨집 사장님들도 치킨민국을 구성한다. 1998년 구제금융 이후 종신고용 문화가 사라지고, 직장인들은 40~50대에 직장을 그만두고 치킨 산업에 뛰어든다. 치킨집의 문턱이 커피 전문점보다 낮은 이유는 그나마 폐업률이 낮고 배달 위주라 넓은 매장을 차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배달 앱의 대표주자 ‘배달의 민족’은 치킨 맛을 감별하는 치믈리에(치킨+소믈리에) 자격시험을 열고 있다. 올해 모의고사에는 자그마치 57만명이 응시했고, 최종적으로 추첨에 뽑힌 500명만 호텔에 모여 시험을 치렀다. 엄격한 자격시험이라기보다는 이벤트에 가깝지만, <치슐랭 가이드>라는 수험교재가 팔릴 정도로 치덕(치킨 덕후)의 열기는 놀랍다.

열흘 전 동물권 활동가들이 치믈리에 자격시험장에서 ‘닭을 희화화하지 말라’며 기습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동물전문 매체 <애니멀피플>이 현장 영상을 입수해 보여줬는데, 페이스북에 댓글만 수천개 붙을 정도로 화제를 일으켰다. 대개는 ‘왜 남의 취향에 간섭하느냐’ ‘그럼 채소도 먹지 말라는 거냐’는 힐난조의 글이었다.

10년 전에 소를 키우던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동네 뒷동산에 묶어놓고 한두 마리 키우는데, 소를 팔기 며칠 전부터는 마음이 불편해 잠을 못 이룬다고 했다. 사실 우리가 먹는 치킨은 닭이라기보다는 ‘덩치 큰 병아리’다. 태어난 지 30일 만에 도축된다. 치킨도 한때 자유를 갈구하던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는 이유는 소비문화가 동물에 가하는 고통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이 시각 치킨민국에 1억7000만마리 닭이 산다. 고기가 되는 닭 9100만마리, 알을 낳는 닭 7100만마리 등이다(2018년 1분기 기준). 전세계에서 한해 500억~600억마리가 도살된다. 1초당 1900마리가 죽는다. 먼 훗날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오면, 도처에 깔린 닭뼈 화석을 보고 놀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불쌍한 닭들의 행성에 살고 있다.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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