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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득의 부끄러움

  • 임범
  • 입력 2018.07.31 14:00
  • 수정 2018.07.31 14:01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huffpost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들의 난민신청 심사 결과 발표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난민신청을 받아줘라’ ‘받아주지 마라’ 논란을 보다가 갑자기 200년 전에 흑산도에서 표류해 먼 나라를 돌다가 3년 만에 귀국한 문순득이 생각났다. 몇해 전 창작물 지원제도의 심사를 하다가 알게 된 인물인데, 지금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전남 우이도에 살던 문순득(1777~1847)은 인근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서 오다가 1802년 1월 배가 바람에 떠밀려 오키나와(류큐왕국)에 도착했다. 류큐왕국은 중국으로 가는 배에 문순득 일행을 태웠는데 이 배가 또 표류해 필리핀(여송·루손)에 닿았다.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 포르투갈 거류지였던 마카오(오문)로 갔고, 마카오 당국이 청조와 연락해 문순득은 광둥성, 베이징, 의주를 거쳐 1805년 1월에 우이도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순득이 표류되기 다섯달 전에 제주도에 필리핀인 5명이 표류해 들어왔다. 피부가 검고 언어가 다른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 조선은, 중국인 표류민들을 중국 선양으로 보낼 때 함께 보냈다. 하지만 중국은 ‘(필리핀인들이) 자기들이 온 수로의 방향을 알 테니 배와 식량을 대주고 함께 바다로 나가’ 찾을 것을 권하며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한참 지난 1809년, 두 명이 죽고 셋이 남은 필리핀인들은 문순득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문순득은 귀국한 뒤, 마침 흑산도에 유배 와 있던 정약전을 만나 자신의 표류 체험을 말했고, 정약전은 이 내용을 <표해시말>이라는 책으로 썼다. 그 책 부록에 간략한 조선어-필리핀어 사전이 실렸고, 이게 제주관청으로 건너가 필리핀인들의 고국을 알아내는 데 사용됐다.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 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돼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조선왕조실록>)

<표해시말>과 <문순득 표류 연구>(최성환)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에게 낯선 나라들이 조선의 표류민에게 친절했다. 오키나와는 “1인당 매일 쌀 한 되 다섯 홉, 채소 여러 그릇, 하루걸러 돼지고기를 주고… 병이 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하고 약을 줬다”. 필리핀은 마카오로 가는 상선을 알선해줬고, 마카오는 문순득이 도착하자 광둥성에 이들을 인수해 가라고 연락함과 아울러 “성대한 대접”을 해줬다. 하지만 문순득이 국외에서 들은 조선의 평판은 달랐다.

문순득은 광둥성에서,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과 같은 배를 탔던 베트남(안남) 사람을 만나 필리핀인들이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고려의 풍속은 좋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내가 나그네로 떠돌기 삼년, 여러 나라의 은혜를 입어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제주에 있으니 안남, 여송인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정말 부끄러워서 땀이 솟는다.”

200년이 지나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들어왔다. 25년 전에 한국은 난민협약에 가입했지만 그동안의 난민 인정률이 유럽의 10분의 1 수준이다. 생색만 내고 있던 난민 정책이 예멘 난민으로 도마에 올랐고, 교황이 예멘 난민에게 기금까지 전달하면서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린다. <표해시말>은 표류자의 주관적 감정을 배제한 채 매우 건조하게 기술돼 있다. 하지만 정약전은, 문순득이 필리핀인을 생각하며 느낀 부끄러움은 자세히 적었다. 후대에는 이런 부끄러움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거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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