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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세요

ⓒ153photostudio via Getty Images
ⓒhuffpost

부르면 오는 것, 부른다고 와주는 것, 그 정의로부터 내게 가장 먼 것은 아마 ‘사랑’일 듯하고 가장 가까운 것은 분명 ‘택시’일 듯하다. 부르면 서는 택시, 부른다고 서주는 택시. 전화로 택시를 부르는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부터 나는 그게 참 신기하였더랬다. 그 놀라운 택시를 하루가 멀다 하고 타는 게 나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운전면허증이 없어서다. 운전면허증이 없어서만이 아니라 파주에 살아서다. 파주에 살아서만이 아니라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어서다.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어서만이 아니라 결국엔 원하는 파주로 올 수 있어서다. 그러니까 집 나갔던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택시.

1998년, 그러니까 20년 전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어쩌다 지각을 하거나 어쩔 수 없이 막차를 놓쳤을 때 그때야 고민 끝에 망설임 끝에 쭈뼛거리며 올라타던 것이 택시였다. 버스도 있고 지하철도 있고 두 다리도 있는데 무슨 택시씩이나…. 어려서부터 알뜰살뜰 엄마의 가계부 지침을 너무 꼼꼼하게 읽어왔던 탓일 게다. 이후로 나는 가정교육에 있어 가장 큰 핵심을 ‘방목’에 두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택시 없으면 못 살아 정말 못 살아 다른 탈 거리 눈앞에 두고도 오로지 택시만 타는 딸이 되었다.

시원하고 편해서도 탄다, 택시. 그러나 택시는 내게 필시 작은 학교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한 책도 있지만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택시에서 여전히 배우고 있다. 어른이 되었다 싶지만 배울 것투성이인 세상사에서 어른에게 어른의 ‘살이’를 길 위에 있음 그 현재로, 오고 가듯이 타고 내리다 결국 바퀴나 나나 멈춘다는 사실을 알고도 달리고 있음, 그 현재로 가르쳐주는 택시. 

휴대폰을 놓고 내려 영영 못 찾게도 하는 게 택시다. 휴대폰을 놓고 내려 바로 찾게도 하는 게 택시다. 정치 얘기를 시작해서 말싸움을 하다 중간에서 내리게도 하는 게 택시다. 정치 얘기를 시작해서 말싸움 끝에 내 논리가 우격다짐인가 한번 정리하게도 해주는 게 택시다. 생방송을 하러 가는 길에 차가 막혀 주차장이 된 도로 위에서 내 늦음을 믿지 않을까 봐 통화로 기사님을 라디오에 출연하게도 만들었던 게 택시다. 내내 한곡의 군가를 한시간이나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상황에 짜증 나기보다 사연이 궁금해서 여쭸다가 기사님 베트남전 참전 얘기를 오지게 듣게도 만들었던 게 택시다. 그러고 보면 애도 낳을 수 있는 곳이 택시다. 그러고 보면 애도 죽을 수 있는 곳이 택시다. 

그 택시, 어느 순간 나로 하여금 시 쓸 거리들을 잔뜩 깔고 앉게 해준 나의 의자, 택시. 택시 안에서 내가 시와 함께 달릴 수 있는 건 대화는 할지언정 내가 보는 게 기사님의 뒷모습뿐이기 때문일 거다. 앞만 보며 달려간다는 일이 실은 누군가의 뒤만 보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거, 그 단순하지만 소소한 ‘봄’과 ‘보임’으로 삶의 비애와 같은 쓸쓸함을 한번 더 껴입어볼 수 있기 때문일 거다. 이 미친 무더위에 그래서 아주 잠시 서늘한 살결이 되어본다면 뭐 굳이 손해일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실은 택시로의 꿈이 있다. 현 위치는 우리 집으로, 도착지는 함경남도 영흥을 찍어보는 일.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니까 북한쯤이야 콜하면 콜하여 택시로 가게 될 날 곧이 아니려나.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세요. 박지웅 시인의 시 전문이다. 제목이 택시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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