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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파키스탄은 함께 부국이 되려 한다. 그 대가는? '인권'이다.

정의 없이 진정한 진보가 가능할까?

  • 허완
  • 입력 2018.07.27 22:36
  • 수정 2018.07.27 22:37
ⓒJI SUB JEONG/HUFFPOST

나는 작년 여름에 큰 형과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다 고함을 지르며 싸웠다.

우리는 내가 몇 년 전에 다녀왔던 과다르(Gwadar)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과다르는 오래된 어촌으로, 내 형을 비롯한 수백만의 파키스탄인들이 화려하고 부유한, 한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미래의 징후로 보고 있는 곳이다. 유독 가난하고 평화로운 날이 드문 발루치스탄주의 남서쪽에 위치한 과다르는 페르시아만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과다르는 아시아와 유럽의 무역과 관계를 확장시키겠다는 중국의 야심찬 ‘일대일로(一帶一路)’ 계획의 일부인, 620억 달러 예산이 들어갈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Economic Corridor)의 중심지가 될 예정이었다.

파키스탄으로서 이 프로젝트는 빠르게 성장하는 불만많은 인구(파키스탄은 이미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다)를 부양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오랫동안 긴장 관계를 유지해오던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카드였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지배하는 태평양을 우회하는 공급 루트를 만들고, 느려져가는 경제 성장(특히 광활한 서부 지역)을 지속시키는 방법이었다. 중국의 수요를 상당부분 충족하는 규모의 중동 석유 등 매년 5억 톤 정도의 선적품이 과다르를 통과할 것이라고 정부는 말하고 있다.

나는 회의적인 편이지만, 나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나처럼 발루치스탄이 아닌 곳에서 나고 자란 2억 명의 파키스탄인들에게 있어 발루치스탄은 국가적 블랙홀이다. 발루치스탄주의 면적은 독일과 맞먹고, 여기에 매장된 가스와 광물은 파키스탄의 경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리란 말을 우리는 계속 들어왔다. 하지만 파키스탄에게 있어서 발루치스탄은 실재하는 장소라기보다는 19세기 미국의 서부와 같은 곳이었다. 파키스탄은 소리소문없이, 책임도 지지 않고 이 지역 원주민들을 종속시켰다. 특히 소수민족인 발로흐족 700만 명을 수십 년 동안 위협하고, 납치하고, 고문하고 차별해왔다. 그 결과 내란이 네 번 일어났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가장 잔인한 내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형은 발로흐족을 진압하고 중국에서 수십억 달러를 빌리는 것이 파키스탄의 파멸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내가 순진한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고등 교육을 받은 내 주위 파키스탄인들 중에는 파키스탄이 잘 해낼 것이다, 혹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독재 국가에게 막대한 채무를 지는 것의 끔찍한 결과를 잘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내 형은 투자할 계획이고, 홀로 되신 우리 어머니가 2030년까지는 파키스탄에 들어올 거라고 당국에서 말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중국 기업, 지원, 대출 자금을 받기에 유리한 입장이 되도록 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가 자란 멋진 교외에 새로 이사온 이웃은 언제나 경호원을 최소 8명 거느리고 다니는 중국인 임원이다.

중국이 통제하고 있는 발루치스탄 과다르 항구에 있는 거대한 크레인의 모습. 2016년 1월.
중국이 통제하고 있는 발루치스탄 과다르 항구에 있는 거대한 크레인의 모습. 2016년 1월. ⓒAKBAR SHAHID AHMED/HUFFPOST

 

그러나 십 년 동안 파키스탄에 대해 글을 써온 나는 파키스탄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운명에게 내 얼굴에 침을 뱉어 달라고 공손하게 부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 중 유일하게 핵무장국인 파키스탄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뿐이다. 그건 부유하고 그 어떤 기관과도 달리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군부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군부는 중국 관련 프로젝트로 신이 났다. 민주주의에 대한 성가신 요구사항 없이 외부 현금이 엄청나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발루치스탄은 무력과 조종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군부는 확신하고 있지만, 사실 다른 대안을 시도해본 적조차 없다.

7월 25일 파키스탄에서는 군부가 계획한 미래에 있어서 중요한 선거가 치뤄진다. 지난 몇 달 동안 군부는 정치인들, 언론, 독립적인 파키스탄 시민 사회를 공격해 왔다. 최근 몇 년 동안 없었던 일이다. 파키스탄의 군사 독재가 2007년에 끝난 이래, 선거로 세워진 정권들은 군부에 도전해왔다. 고위 장성들은 권력을 최종적으로 굳히고 싶어한다. 투표 결과를 보면 그들 뜻대로 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 제2야당의 임란 칸 총재가 승리했다] 전반적으로는 혼란스러운 분위기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정치인은 현재 수감 중이다. 발로흐족보다도 수가 많은 소수민족 파슈툰족은 유례없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환율과 증시는 추락하고 있다. 탈레반과 ’이슬람국가(IS)는 힘을 키우고 있어 주변국 상황도 악화되는 중이며, 이란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긴장도 고조되고 있다. 미국은 교전을 지원하는 파키스탄을 압박할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 중이다.

파키스탄과 발로흐족과의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발로흐족은 중국과의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무엇을 얻게 될지, 유혈 내란이 과연 종식되기는 할지 알 수 없다.

나는 약 2년 전에 고위직 파키스탄인, 사정에 정통한 발로흐족, 서방 국가의 정부 관계자, 인권 및 인도주의 단체, 재계 인사, 전문가들과 함께 작은 비행기를 타고 과다르로 가며 발루치스탄 문제를 논의했다.

내 의문들은 한 국가의 한 주에 국한된 특이성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돈을 벌어들이고 세계 정치를 재구성하겠다는 파키스탄의 원대한 비젼이 한 번도 평등한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소수 집단의 길고 안쓰러운 역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러나 효율적인 현대 자본과 국가 권력,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땅에 밀착을 느끼는 감정이 있는 보통 인간들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면서 이러한 딜레마는 전세계 모든 국가들이 겪고 있다. 파키스탄과 중국은 발루치스탄을 협박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정의 없이 진정한 진보가 가능할까?

***

파키스탄은 처음 생겼을 때부터 발로흐족을 관리해야 할 문제로 취급하는 정책을 유지해 왔다. 파키스탄 건국의 국부로 불리는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1948년에 처음으로 발루치스탄에서 군사 작전을 펼쳤다. 불과 몇 달 전에 400년의 역사를 지닌 발로흐족의 준국가 칼라트 칸국의 지도자와 맺은 신사협정을 파기한 것이다. 발로흐족 민족주의자들은 1948년, 1958년, 1962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1971년에는 파키스탄 최초의 총선거를 통해 발로흐족 민족주의자 정치인들이 처음으로 발루치스탄주를 장악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대통령은 처음에는 이를 승인했으나, 발로흐족 정부가 분리주의 전쟁을 위해 이라크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해임했다(역사가들과 미국은 이 주장을 반박한다). 발로흐족 수만 명이 게릴라전을 펼쳤으며, 방글라데시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파키스탄군은 이미지 회복을 위해 죽기살기로 싸웠다. 8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77년에 지아 울 하크 장군이 부토 대통령을 밀어내고, 자신이 파키스탄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발로흐족에게 유화적 메시지를 보냈다. 핵무장 열망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소 대리전에 정신이 팔린 그는 발로흐족을 내버려 두었다. 발로흐족은 평화가 찾아올 때 그들의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해 볼 여유가 생겼고, 유례없는 공직 취업의 문과 교육의 기회가 열렸다.

그리고 9/11 사건이 일어났다. 예전에 파키스탄과 미국이 무장시켰던 아프가니스탄 근본주의자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국은 파키스탄에 돈을 퍼부었다. 군사 독재자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발루치스탄을 변신시킬 개발을 해주겠다며 경제적 기적을 약속했다. 발로흐족 지도자들은 파키스탄 다른 지역은 이미 발루치스탄의 천연가스로 이윤을 올리고 있다고 쏘아붙였다. 2004년 내내 논란이 점점 심해졌고, 2005년 초에 국유 가스 시설에서 일하던 의사가 무샤라프 군 장교들에게 강간당했다고 신고했다. 무샤라프 군을 점령군으로 보는 시각이 이미 존재했던 터라, 발로흐족은 명예를 공격받았다고 느꼈다. 진짜 내전이 터졌다. 2005년 여름까지 민간인 수십 명이 사망했다. 협상은 불가능했고 날씨는 뜨거웠다. 8월24일에 발루치스탄주 북동부의 발로흐족 민족주의자 캠프에서 발포하자, 파키스탄 군인들은 이틀 반 동안 공격을 펼치고 동굴 입구의 지뢰를 터뜨렸다. 동굴은 무너졌다. 부족의 영웅인 전 주지사 나와브 아크바르 칸 북티가 깔려 숨졌다. 파키스탄측은 그가 있다는 걸 몰랐다고 주장한다.

“통치자와 군대는 끝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한 발로흐족 지도자의 예상이다. 북티는 부토가 발루치스탄을 공격했던 1970년대에도 정부 고위직을 유지했으나 민족주의자로서의 신뢰성도 지켰다. 발로흐족에게 있어 북티의 죽음은 아무리 유명하고 정당하고 양보해도 완전한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였다.

“정부는 자기측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는 … 그들이 가다르(ghaddar)라고 말한다.” 발라크 셰르 마자리 파키스탄 전 총리가 배반자를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내게 한 말이다. 마자리는 1940년대에 북티와 함께 자랐다. 그들은 파키스탄의 발로프족 지도자 1세대의 거물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수십 년 동안 반군과 파키스탄 지배층 사이에서 조심스레 균형을 잡았다. “그들이 대체 왜 아크바르를 죽이는가?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마자리의 말이다. 

발루치스탄 지도자 아크바르 칸 북티(오른쪽)는 이후 '사고'로 규정된 사건으로 정부군에 의해 목숨을 잃기 전까지 파키스탄 주류 정계에서 활동했다.
발루치스탄 지도자 아크바르 칸 북티(오른쪽)는 이후 '사고'로 규정된 사건으로 정부군에 의해 목숨을 잃기 전까지 파키스탄 주류 정계에서 활동했다. ⓒZeeshan Haider / Reuters

 

북티의 사망으로 인해 발로흐족의 분노는 수십 년 동안 유례가 없었던 수준으로 치솟았다. 처음으로 발루치스탄의 중산층 전문직들도 북티와 마자리에게 충성스러웠던 부족 사회와 마찬가지로 정부에 맞서고 나섰다.

그 이후 양측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발로흐 무장세력은 정부에 고용된 사람이라면 심지어 교사라 해도 공격 대상으로 보았다. 발로흐족 수천 명이 정부군에 의해 경고도 재판도 없이 사라졌다. 일부는 감옥으로, 일부는 집단 무덤으로 갔다. 구금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잔인한 구타와 언어 학대를 당했다고 말했다. 나는 과다르를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무장군을 볼 수 있었다. 가이드들은 내게 정부나 반군의 감시를 받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한가롭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다. 한 번은 특정 방향으로는 쳐다보지도 말라고도 했다.

현재 분쟁의 기본 양상은 점점 더 멀어져가는 무장 발로흐족 연합 vs. 강력함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굳게 믿는 세계 최상급 군대의 게릴라전으로 고정된 상태다.

파키스탄군은 발로흐족을 특별한 골칫거리로 보고 있다. 기꺼이 협상을 하고 가끔 뒤통수를 치는 정치인들 및 종교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르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것이 체계적으로 막혀있으며 집단 처벌을 받는다는 발로흐족의 불만을 파키스탄군은 파키스탄 그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억압당하던 한 민족 집단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떨쳐 일어났을 때의 기억은 파키스탄군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파키스탄인에게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게 남아있다. 그때 파키스탄은 망신스러운 패배를 당했고, 방글라데시라는 독립국가가 생겨났다. 파키스탄의 최대 권력자들에게는 발루치스탄에 대한 아무리 작은 양보도 지나친 양보로 보인다.

발로흐족 압박 정책은 이제 발루치스탄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증거가 간간이 흘러나온다. 가끔 시위가 열린다.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에 사는 나는 1월에 작은 신문 기사를 보았다. 발로흐족 대학생 두명이 사복 및 정복 경찰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보도였다. 그들의 죄목은 다른 발로흐족 학생 체포에 대한 항의 시위 참가였다.

***

발로흐족 엘리트들이 평화를 지키고 정부의 문제와 중국의 우려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 다양한 자원과 인맥을 물려받고, 발로흐족 지역 사회의 권리에 대한 유려한 철학적 주장을 펼 줄 알았던 이 엘리트들이 수십 년 동안 파키스탄인과 전세계에 대한 발로흐족의 불만을 정의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예비 지도자들은 협력을 밀어붙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학교 친구 자라인 막시의 도움으로 과다르에 다녀오자마자 예비 지도자 4명을 만날 수 있었다. 자라인 막시는 카리스마 있는 26세 청년으로, 광범위한 정치적 힘을 지닌 집안의 후손이다. 한 파키스탄 신문은 이 집안의 지도자는 “자신만의 작은 의회를 구성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라고 했을 정도다.

나는 통보 받은 곳에 통보 받은 시각에 도착했다. 내 집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카라치의 빌라였다. 응접실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전통 의상을 입고 수염을 기른, 남자다움을 뽐내는 네 명의 젊은 남성들을 마주했다. 내 슬림컷 바지가 너무 슬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스카치를 마시며 친근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느릿느릿한 영어로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막시와 친구들은 할 말이 많았다. 그들은 발루치스탄의 역사와 가치 체계를 설명하고, 서로의 말에 큰소리로 동의했다. 이견을 내야 할 때면 조심스레 존중을 담아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라며 들어온 이야기와 논쟁들을 들려주었다. 사실상 서로에게 말하는 셈이었는데, 그런 게 처음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물려받은 배신감, 배반했다고 받았던 비난을 나와 공유했다.

“나는 파키스탄군을 일단 믿어주려 했다.” 막시의 가족이 파키스탄 군부와 정치계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발로흐족 파트너가 되고 나서, 막시는 어린 시절을 카라치의 이런 집에서 보냈다. 2006년에 파키스탄이 북티를 죽이자 파키스탄에 대한 막시의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나는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기를 집어드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만약 구석까지 내몰린다면, 강도들이 당신의 집에 찾아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 발로흐족들을 다 없애버려. 펀자브인이 처리할 거야.” 막시의 말이다. 파키스탄 군은 펀자브인들이 지배하고 있다.

벅티의 조카 와샤네 벅티가 함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그가 찾아왔다는 게 하나의 행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게에서 우연히 파키스탄 군 장교를 만나게 되어 가볍게 자기 소개를 했다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감시받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현 상태에 불만을 품고 있다. 그들은 파키스탄과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며, 파키스탄의 가장 강력한 이념과도 거리를 두었다. 북티는 자신이 무슬림이 아니게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발로흐족이 아니게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발루치스탄 동굴에 숨은 반군과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 북티는 그 장교에게 자신이 디펜스에 산다는 걸 밝혀 자신의 충성을 증명했다. 디펜스는 군이 소유한 카라치의 상류 거주층이다. 우리가 만남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발로흐족의 싸움을 이끌었던 발로흐족 상위 계층 중 가장 혁명적인 이들(아크바르 북티와 나란히 싸웠던 북티의 사촌 바라함다그 등의 인물)은 현재 망명 중이다. 그들은 파키스탄을 비판하고 파키스탄의 적인 인도나 이스라엘 등의 환심을 사려 한다. 발루치스탄의 일상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파키스탄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은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유지하며 남들 몰래 투덜거린다. 평등을 위한 공개적 전투가 일어나 큰 피해가 일어날까 두려워한다. 파키스탄에서는 정말 많은 민족, 종교, 성 등 소수집단들이 전투의 길을 걷는다. 북티 부족을 비롯한 일부는 사실상 군부의 꼭두각시다. 발루치스탄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에 발로흐족의 얼굴을 입히는 역할을 한다.

발루치스탄이 파키스탄의 주가 되고 나서 처음 60년 동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크바르 북티의 죽음과 지난 10년 동안 파키스탄 군에 의해 이뤄진 집단 처벌 때문에 중산층 발로흐족 수백만 명이 과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디펜스에 살 정도의 재력은 없지만 부족 계층이 지배하는 무미건조한 북부에 살고 있지도 않다.

“예전에는 하층 계급의 이슈였다가 엘리트의 이슈가 되었고, 지금은 중산층의 이슈다.” 막시의 말이다. 이러한 현실은 파키스탄에게 있어 위험하며, 아이러닉하게도 파키스탄의 정책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납치, 발로흐족 승진 금지, 부족 지도자들이 구제불능의 수준으로 부패했다는 수십 년에 걸친 정부와 군대의 프로파간다 등이 있다. 여러 세대에 걸쳐 발로흐족 지역사회를 운영해온 지도자들은 이러한 정책은 정부의 적절한 지원과 책임이 뒤따르지 않으면 발로흐족을 더욱 소외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군 장성들은 발로흐족 지도자들이 그저 권력에 집착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현재 반군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은 알라 나자르 발로흐다. 그는 중년이고 중산층이며 의대생 출신이다. 발로흐 해방전선(BLF)을 이끌고 있으며, 투옥과 암살 시도를 여러 번 겪고도 살아남았다.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좋은 직장을 원하지만 심지어 자신들의 지역에서도 파키스탄에게 2급 시민 취급을 받는다고 느끼는 발로흐족 젊은이들은 나자르에게 끌린다. 2005년에 충돌이 일어난 뒤 파키스탄 보안군은 나자르를 1년 이상 감금하며 수시로 구타하고 위협했다. BLF는 파키스탄 공무원들을 여럿 죽이고 납치했다. 하지만 나자르는 비밀리에 추종 세력을 형성했다. 

발루치스탄 반군 지도자 알라 나자르 발로흐. 그는 발루치스탄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고 파키스탄 기득권과 거리를 두는 데 있어 덜 단호했던 다른 부족장들과는 매우 다른 인물이다.
발루치스탄 반군 지도자 알라 나자르 발로흐. 그는 발루치스탄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고 파키스탄 기득권과 거리를 두는 데 있어 덜 단호했던 다른 부족장들과는 매우 다른 인물이다. ⓒStringer Pakistan / Reuters

 

“전국의 발로흐족들과 이야기하며, 나는 그가 얼마나 인기있는지 알게 되었다.” 나자르를 인터뷰한 극소수 파키스탄 기자 중 하나인 마흐비시 아흐마드가 2012년에 쓴 글이다. “나자르의 발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를 이야기하며 뺨을 붉히는 어린 소년을 만난 적이 있다. 좌절한 소녀들은 산속에 있는 그와 언제 합류할 수 있는지 묻는 긴 편지를 썼다. 그의 이름으로 발로흐 노래를 만든 시인들도 발견했다.”

나자르의 단체와 무장세력들의 규모는 수천 명을 넘지 않지만, 수백만 명으로 이뤄진 지역사회에서 무언의 지지를 얻는다. 또한 그들은 현재 군대 및 정부와 협상하고 있는 측보다 더 진정하고 정당한 발로흐족의 대표로 보일 수 있도록 애쓴다. 파키스탄의 정책이 이제까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발로흐족이 다른 대안을 원하는 것을 비난하기란 어렵다. 거슬리는 검문소가 어디에나 있고, 과다르 주민들을 강제 퇴거 시킬 계획이 수립되고, 군이 양성한 극단주의 단체에 뿌리를 둔 IS가 최근 대규모 테러를 벌였다. 정부의 정책은 파키스탄과 발루치스탄의 안정성에 있어 좋지 않다.

***

이번 선거를 앞두고 거의 모든 당에서는 발루치스탄 처우 개선을 약속했다. 여당이었던 파키스탄 무슬림연맹-나와즈(PML-N)는 부족 출신이 아닌 중산층 발로흐족을 최초로 지사로 임명했음을 내세웠다. 이번에는 군대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제1야당이었던 파키스탄인민당(PPP)과 이번에 승리한 제2야당 테흐리크-에-인사프(PTI)의 고위 당직자들은 중국 계획의 균형을 재조정해 파키스탄 소수 민족들에게 실질적 이득이 돌아가게 하겠다고 허프포스트에 밝혔다. 그러나 발루치스탄의 미래를 결정지을 프로젝트가 현실에서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는 선거와 무관하게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파키스탄 군이다. 발루치스탄과 중국 정부에 대한 군부의 입장은 이미 분명하다.

중국의 대규모 일대일로 개발 계획에 관련된 그 어느 국가보다도 파키스탄에 대한 중국의 내정 개입이 심하다고 오스트레일리아 디킨 대학교의 연구자 자히드 샤하브 아흐메드는 말한다. 아흐메드는 파키스탄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현재 파키스탄 대도시 어디를 가나 중국 측 인물들이 있다. 지난 2월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과 발로흐족 무장집단 사이의 비밀 대화를 보도했고, 3월에는 파키스탄 정부가 미국 언론인 대표단을 과다르로 초대해 해외 항만을 관리하는 중국 기업 COPHC(China Overseas Ports Holding Company Ltd)의 장 바오종과 만남을 주선했다. 파키스탄 의상을 입은 장은 자신은 파키스탄을 ‘좋은 일’을 하는 ‘좋은 아이’로 본다고 말했다고 기자 크리스티나 웡이 전했다.

중국의 의사 결정권자들이 발로흐족을 박살내야 할 반군이 아닌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양측 정부와 폭넓은 대화를 나누어 본 독일 마샬 펀드의 애널리스트 앤드류 스몰이 내게 말했다. 아흐메드는 중국이 과다르에 병원과 학교를 지을 계획임을 언급하며, 파키스탄 군이 발로흐족 모병에 보다 힘을 쏟고 있다고 덧붙였다. 막시는 지난 한 해 동안 군이 발로흐 지역사회에 새로운 봉사활동을 해온 것을 보고 군이 ‘낡은 정책’을 버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가길 원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선거 전날에 말했다.

그러나 양국 정부 모두 소프트 파워를 통한 문제 해결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는 편이다. 중국의 발루치스탄이라 할 만한 곳인 무슬림이 다수인 신장 지역에서 중국 정부는 대규모 감시, 반정부 인사와 가족들에 대한 위협, 자체 문화의 표출에 대한 가혹한 제한 등을 시행하고 있다. 파키스탄 최대규모의 영자신문 DAWN은 작년에 경제회랑 계획 초안을 보도했다. 파키스탄 주요 도시들에 대규모 감시 시스템을 설치해 양국 정부가 도로와 시장을 24시간 감시하자는 제안이 들어가 있었다. “감시 시스템에 수집한 시그널을 지휘본부로 보낸다고 하는데, 지휘본부에 누가 있을 것인지, 어떤 시그널을 찾을 것인지, 누가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DAWN은 분석했다. 파키스탄 당국은 이 계획은 확정되지 않은 ‘작성 중’인 문건이라고 주장했다. 

중국과 파키스탄 정부의 경제협력 논의에도 불구하고 2016년에 촬영한 이 공항처럼 과다르의 시설들은 여전히 낙후된 상태다.
중국과 파키스탄 정부의 경제협력 논의에도 불구하고 2016년에 촬영한 이 공항처럼 과다르의 시설들은 여전히 낙후된 상태다. ⓒAKBAR SHAHID AHMED/HUFFPOST

 

굴할줄 모르는 파키스탄의 인권 활동가 네트워크와 일부 정치인들은 번영의 이름으로 억압을 강화할 가능성에 대한 저항을 이미 시작했다. 유례가 없는 수준의 해킹과 스파이웨어 공격이 일어나고 있고, 정부의 언론 규제도 심해졌다. 보다 현실적인 목적으로 발로흐족과 동조하는 세력도 있다. 중국이 과다르와의 무역 루트를 발루치스탄 등 파키스탄 서부로 잡지 않고 지금도 부유한 동쪽 지역의 군사 중심지 펀자브를 지나게 할 것을 우려하는 작은 지역들이 있다. “분배는 투명하게,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국회의원직에서 은퇴한 오스만 사이풀라 칸의 말이다. 칸은 북서부 지역인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에 사업 관련 이해 관계가 있다. 칸은 이 계획을 감독하기로 한 의회 의원회 세 개 중 하나의 회원이었다. 그는 최종 루트의 지도를 본 적도, 중요한 세부사항을 들은 적도 없다.

군대와 중국에 대해 더 큰 억제력을 가진 것은 파키스탄과 교류한 역사가 길고 영향력이 큰 서부 국가들, 즉 미국과 영국이다. 영국과 미국이 직접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과다르 프로젝트는 이들 국가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불안정을 반드시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을 의식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키스탄이 보유한 핵무기가 잔뜩 있으며 증가추세인 것도 이유다. 작년 여름의 미국 국방부 문건에서는 발루치스탄에 중국군이 주둔하게 될 경우에 대한 우려가 담겨있다. 중국이 12월에 비슷한 경제 협약 이후 상환의 일환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스리랑카 항구를 장악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인근의 미국 우방국들도 경계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수익성이 좋은 인근의 항구 제벨 알리의 경쟁 상대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인도는 과다르에서 불과 수백 마일 떨어진 이란의 차바하르 항을 개발하여 경쟁하려 하며, 최근 친미 국가인 오만의 인근 항구에 대한 해군 접근권도 얻었다. 2016년 초, 파키스탄은 발루치스탄에서 전직 인도 해군 장교를 체포하고 스파이 혐의를 씌웠다. 인도 측은 부인했으나, 인도 언론은 그가 인도 정보기관과 관련이 있다고 보도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역사적 라이벌인 인도가 은밀히 발로흐족 반군을 돕고 있다고 오래 전부터 의심해왔다. 그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나오면 발로흐족에 대한 공정한 처우를 모색하는 인물들이 곤경에 처하며, 강경파가 발로흐족에 계속 타격을 날리는 것을 정당화한다고 막시는 내게 말했다.

영국과 미국 정부는 발로흐족의 우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양국 여러 관리들이 허프포스트에 전했다. 그러나 미국은 여러 해 전부터 중국의 개입이 발루치스탄 전투를 틈타 성장한 극단주의자들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왔다. 이 극단주의자들이 파키스탄 군으로부터 비밀리에 군사적 지원을 받고 있지 않느냐는 의심이 널리 퍼져있다고 국무부 출신의 샤밀라 차우드하리가 내게 말했다.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 정권 동안 국무부에 몸담았던 그녀는 미국은 발루치스탄 개입이 미국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아니라고 평가했다. 무슬림 지역사회는 잔혹하게 ‘관리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정권에서 이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미국과 오랫동안 잡음을 빚어왔으며 트럼프의 직접적인 비난과 압박을 받아온 파키스탄측 역시 미국의 개입을 반기지 않는다. “미국 정책을 보면 미국은 우리를 중국의 품안으로 밀어넣고 싶어하는 것 같다.” 전 국회의원 칸의 말이다. 중국에게 있어서는 미국이 못 본 체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미국 평화연구소에 따르면 중국의 목표 중 하나는 중국 내의 반항적인 소수 집단(주로 무슬림인 위구르족들)이 생산한 상품들에 대한 수요를 파키스탄 내에 만드는 것이다. 중국은 자국내 안정성 유지에 급급해 파키스탄 안정성의 복잡함에는 별 관심이 없다.

현실적으로 발루치스탄의 조마조마한 사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이 중국의 경제 계획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고, 지역 IS 지부들이 더 대담해지면 위험은 커지게 된다. 파키스탄군은 주 전역에 걸친 엄중단속을 영원히 유지하거나, 전략과 발로흐족 파트너를 바꿔가며 계속 버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아흐메드는 내게 말했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나고 자란 수백만 명의 발로흐족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파키스탄인들 상당수에게 있어 이는 너무나 지나친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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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간 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발루치스탄 이슈를 의논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말릭 시라즈 아크바르였다.

아크바르는 깡마르고 안경을 쓴 30대의 발로흐족 언론인이다. 내가 이야기를 나누어 본 거의 모든 사람들은 현직 공무원부터 국제 외부 전문가, 부족 지도자 후계자들까지 그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언급했다. 그는 파키스탄 정치인들과 무장 민족주의자들의 시각 모두를 깊이 이해한다. 발루치스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파키스탄 주류 매체, 뉴욕타임스 등 국제적 매체, 선구자적인 그의 블로그 The Baloch Haal에 실린 그의 글들을 읽었다. 내가 만나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아크바르를 인터뷰하지 않는다면 나의 글은 미완성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크바르를 만난 나는 그가 파키스탄에서 살며 겪은 경험은 발로흐족이 아닌 특권층인 나의 삶을 거울에 비춘듯한 정반대의 모습임을 깨달았다. 그는 아크바르 북티와 자라인 막시, 내가 다닌 곳과 같은 학교에 가는 것은 자기에겐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발루치스탄의 파키스탄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의 가문에서 학사 학위를 딴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무장 집단 지도자 알라흐 나자르도 당시 비슷한 학교에 다녔다. 그들은 발로흐족 학생 단체에서 함께 아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발로흐족을 “선임하여 체제에 통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아크바르는 주장한다. “과거에 중산층이 관여하지 않았던 것은 정부가 중산층을 적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도움으로 그들은 운동 전체를 무효화시켰다.”

“이번에는 그 반대다.”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발로흐족 전문직(교수, 언론인) 중 투옥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이들은 감금되고, ”사라졌고”, 파키스탄 보안군에 의해 살해된 경우도 한 두번이 아니다.

아크바르는 현명한 중앙 정부라면 필수적인 현장직으로 고려할 만한 사람이다. 발로흐족의 고통에 대해 뜨거운 마음을 품고 있는 동시에 파키스탄 안에서 발로흐족의 정당한 몫이 무엇일지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다.

2018년 2월14일 기준으로 그는 미국 시민이 됐다. 워싱턴에서 살고 일하고 글을 쓴다. 8년 전에 파키스탄 당국이 그의 뉴스 웹사이트를 차단했고, 몇 달 뒤 그의 삼촌, 형, 연로한 부모가 파키스탄을 떠나 미국에 망명을 신청하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그를 동네에서 가끔씩 만난다. 우리는 친해졌고, 남아시아 지역사회내의 우리의 삶, 커리어, 우정에 대해 잡담을 나눈다. 그는 새 글을 발표하거나 동네 행사에서 연설을 하게 되면 내게 알려준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파키스탄을 집이라 부른다. 언제든 날아갈 수 있다. 언젠가 찬란해질 과다르를 보러갈 수도 있다. 발로흐족인 내 친구는 그러지 못한다.

 

* 이 글은 허프포스트US의 China And Pakistan Plan To Get Rich Together. The Price? Human Right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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