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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불가능한 시대, 최인훈이 세상을 향해 보낸 신호

  • 김명인
  • 입력 2018.07.26 13:45
  • 수정 2018.07.26 13:50
ⓒ문학과 지성사
ⓒhuffpost

지난 달 21일 입원중인 선생이 나를 보고싶다셔서 문안을 드리러 갔으나 직전까지 몇 마디 말씀을 하셨다더니 말씀은 못 하고 눈만 마주보고 두 손으로 꽉 잡은 내 손을 오래도록 놓지 않으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쓰니 마치 내가 고인과 유달리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겠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2003년에 고인의 마지막 단편소설 <바다의 편지>를 황해문화에 게재하게 되면서 그 무렵 두 번 정도 만나뵌 게 전부다.

그 전, 90년대 후반에 그의 <화두>를 뜨겁게 읽기 전까지 내게 그는 누구에게나 대개 그렇듯 <광장>의 작가였고, 그 작품은 이미 문학사 저 편의 기념물이었지 내 젊은 날의 피땀 흐르는 현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두>를 읽는 동안 최인훈은 문학사의 몇 개의 지층을 넘어 나에게로 왔다. 나는 울면서 그 지독한 기억의 숲을 헤쳐 나갔다. 이 사람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 자신이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는 가슴 속의 순금같은 믿음과 꿈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문학까지도 닭 목을 비틀듯 원래의 목소리를 못 내게 해야 했던 사람. 말이 불가능한 시대에 만든 인공어의 세계가 그의 문학이었고 그는 그 인공어를 사용해 불만 가득한 몸짓으로 세상을 향해 겨우겨우 신호만을 보내왔던 것이다. 내가 아는 최인훈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제밤 빈소에서 만난 평론가 정홍수는 이런 얘기를 듣더니 “자발적 비전향 장기수였군요”라고 말했다. 촌철살인이었다.)

2003년 즈음 두 번의 만남 동안 선생은 마치 오래 굶주린 사람처럼 나라는 보잘것없는 후생에 탐닉했다. 경이로운 만남이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선생의 나에 대한 관심과 끌림은 상상하기 힘든 정도였다. 왜일까. 그는 왜 나 같은 반쯤 전향한 얼치기 주의자와의 대화에 깊이 빠져들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른다.

그는 그 후로도 나를 계속 찾았지만 나는 그의 그 뜨거운 노후의 집요한 정념이 차라리 무서웠고 그러는 동안 일년 이년 시간이 가고 그게 벌써 15년도 저 편의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방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선생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오늘 최인훈 선생을 보내드리고 왔다.

이젠 그는 더 이상 나를 부르지 못한다. 보고 싶다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젠 내가 그를 불러야 할 차례인 것 같다. 그게 예의다. 병실에서 겨우 듣기만 하는 선생에게 어서 일어나 회령도 원산도 다시 가 보셔야 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제 내가 그의 외로운 혼을 모시고 회령이며 원산이며 가 봐야 하겠다.

많이 늦기 전에, 내 눈이 채 더 어둡기 전에 선생의 영전에 이미 너무 늦어버린 최인훈론 한 편을 바쳐드릴 수 있을까?

* 25일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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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최인훈 #광장 #화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