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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7월 25일 14시 55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7월 25일 14시 55분 KST

장르문학은 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기획회의』 468호 이슈 ”대중문화 인문학” - 장르문학이라는 새로운 인문학 객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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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객체들의 정체성

인문학을 무엇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다양한 정의들이 나올 수 있지만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인문학이 인간을 향하고 있고, 인간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다소 오해를 받아왔다. 인문학이 마치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마법의 도구처럼 생각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인지 한국에서 인문학 하면 먼저 ‘처세술’과 같은 것이 떠오르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법칙과 연결되곤 했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약진을 통해 인문학이 재조명된다고 이야기했을 때도, 그것은 아이폰과 같은 혁신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혁신을 위해선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인문학 강좌에서 들어야만 했던 것은 고전문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와 사회학에 대한 강좌들뿐이었다. 마치 그것들만으로 우리가 혁신을 이뤄내고, 미래를 선도할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들이 휘몰아쳤었다. 하지만 채 10년도 가지 않아 조직과 대중,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열심히 강조하던 이들마저 관심이 시들해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언표들만이 우리 주위를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오히려 알아보니 별것 없더라는 인식들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강연들이 열리고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모호해졌다. 그러는 사이, 인문학 열풍에 강연자로 나섰던 교수들과 학자들의 이름값이 어느 정도 올라간 것을 대가로 인문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문송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야 했다.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것과 같은 형색이 되어버렸다. 지난 10여 년 동안의 시간을 들여 결과론적으로 인문학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불필요한 무언가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는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무지(無知)들이 인문학을 기만한 것뿐이다. 적어도 인간이 멸종하지 않는 한, 인문학은 불필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인문학이 고사 직전으로 보이는 것은, 인문학이라는 것에 너무 좁은 잣대를 들이대고 마치 인문학이 정형화된 무엇인가인 것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경전이 아니다. 또한 인문학은 도서관의 비밀 서고에 잠들어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luoman via Getty Images

 

물론 위에서 열거한 고전문학이나, 철학, 역사학과 같은 것들이 인문학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인문학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위에서 열거한 전공의 인재들의 사회 진출이 녹록지 않은 것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추세다. 그것은 인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 인문학의 정수이고 본질이라는 인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여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모든 영역에 관여하고 우리에게 산재한 의미들을 밝히는 데 필요한 것들이 인문학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문명을 발화하고 수천 년 동안 쌓아온 기술과 문화의 다양성에 따라 인문학의 영역들 역시 진화하고 분화해왔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면, 그것을 이해하고 통찰할 만한 인문학의 모습들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발전해왔을 것이다. 그렇게 인문학 내의 다양한 객체들은 항상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아 왔다. 그저 우리가 여전히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특히 우리는 한국문화 내에서 계속 존재해왔고, 발전한 장르문학에 대한 인지가 부족했다. 문학이라는 방법론으로 인문학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도 자꾸만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아 보이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는 장르문학이란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문학을 통한 인문학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인문학, 한국문학, 장르문학

인문학의 어원이 되는 후마니타스Humanitas는 인간의 본성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결국 인간이 어떠한가에 대한 질문들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들도 필요하지만, 인간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간과한 것이 있다. 문학이 인간들의 삶을 통찰해 구현하고, 그러기 때문에 인문학적으로 가치가 발생한다고 하면서 문학이라는 것의 형식을 너무 협소하게 잡아온 것이다. 정형화된 예술로서의 문학, 고전으로서의 불변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처럼 여기고 있는 문학에 대해서만 인문학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 역시 인문학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데, 인문학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협소한 의미로 규정되어 있는 현재 한국문학은 인문학적인 가치를 기민하게 적용하기에 부족하다. 이것은 한국문학의 가치를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다. 리얼리즘에 근간하여 형식적인 엄정성과 주제의 정형성이 존재하는 한국문학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급속도로 허물고, 텍스트와 영상, 문자언어와 음성언어, 시각기호와 공감각적인 기호들의 혼재와 분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현재의 모든 것들을 다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특히 1990년대 이후로 형태가 급변하는 사회를 한국문학이 견지해왔는가는 회의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문제는 21세기 이후로 더 커졌고, 그것이 한국문학이 대중들과의 거리감을 형성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이 더 이상 문학이 재미없고, 흥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의 원인을 그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Dina Belenko Photography via Getty Images

 

피에르 부르디외가 규정한 아비투스habitus는 후천적인 교육과 경험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대중의 취향은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이 대중들의 취향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그들의 경험과 거리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대중들이 문학을 찾지 않은 이유를 단순히 대중들이 서사를 향유하는 습관으로부터 멀어졌다고만 볼 수도 없다. 실제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웹소설 같은 경우 작품 당 구독자가 10만 명에서 많게는 100만 명을 넘어선다.

대중들은 아직 문자로 이루어진 서사를 외면하지 않았다. 외면당한 것은 한국문학이라는 형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은 이제 가능성을 상실해버린 것인가. 현재까지의 정의들만이 한국문학이라고 규정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전과 같은 의미를 부여받을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문학에서 문학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던 영역들을 생각한다면 다른 가능성이 생긴다. 바로 그동안 외면해왔던 장르문학에 대한 이야기다.

장르문학은 이전까지는 통속문학, 혹은 대중문학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이 아닌 무언가, 혹은 문학 바깥의 어떤 것이나 방법론의 한가지로 여겨졌다. 그러던 것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장르문학이라는 말로 치환된다. 이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제시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사 지형의 헤게모니가 변해가는 것을 감지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지한 것에 비해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한 방법론들은 발전하지 않았다. 장르문학이라는 언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통속문학과 대중문학을 논할 때와 논조도, 시선도, 인지의 온도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여전히 장르문학은 한국문학과 동떨어진 무엇인가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문단의 이러한 인식은 대중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대중들은 이미 익숙해진 장르문학의 독서경험에 대한 의미부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자신의 취향이 어떠한 것인지 명확하게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인문학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인문학적인 자산들과 관계가 지속되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했다.


새로운 경험과 잃어버렸던 것들

우리가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장르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장르문학에 어떤 대단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선은 그것이 원래 문학이기 때문이다. 또한 장르문학으로 인문학인 성찰을 하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왔던, 그리고 배제해왔던 것들에 대한 재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그동안 한국에서 인문학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고 변해가는 것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인지해야 하는 것은 장르문학이 문학이나 인문학을 새롭게 의미부여해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문학과 인문학의 영역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에 대해 항상 대중 수용적이고, 상업적인 잣대들로만 의미를 부여해왔다. 인문학적인 방법론이 부족하고, 자원이 빈약하다는 문제 제기가 지속될 동안 이러한 영역들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여전했다.

장르문학은 장르genre라는 명백한 특성들을 유용하기 때문에, 장르별로 견지하는 영역들이 뚜렷한 편이다. 그것이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를 중요시하는 한국문학에서 장르문학에 대한 가치를 폄훼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르적 관습과 코드들이 수많은 에피고넨(아류)들을 형성한다는 것은 관련된 문제들의 누적과 심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실제 장르적 관습들은 단순히 이야기를 도식적으로 구축하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해당 구조들을 통해 특정한 영역들을 구체화하면서 발달했다. 로맨스 같은 경우에는 근대 이후 인간들에게 보편적인 정서가 되어버린 연애에 대한 다양한 층위들을 세분화해왔다. 그것을 통해 그 안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형태들에 집중함으로써 연애를 통해 얻어지는 무엇이 아니라 연애와 연애의 형태 자체에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현대에 다양화되고 있는 객체들의 정체성 찾기와 관계 맺기에 대한 다양한 의미에 부합할 수 있다.

환상의 세계는 더 이상 환상이 아니다. 환상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속화시킨 것은 사실 매체의 발달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체의 발달로 인해 환상의 세계는 더 이상 매체 속에 머무르지 않고 거대한 시뮬라크르로 우리의 삶에 자리 잡게 되었다. 다양한 매체들의 적극적인 환상 유용은 독자들이 환상적인 세계를 머릿속에 구상하는 데 거부감을 줄여주었다. 그렇게 되자 환상은 본래의 속성들을 대중들에게 마음껏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환상이 보여주는 세계에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대리만족을 느끼며, 삶에서의 새로운 의미들로 재생산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치환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환상이 그저 현실에서의 도피로만 여겨지던 세상과는 다른 양상들이 펼쳐진 것이다. 이것은 지난 몇 년간 급속도로 변화된 영역이다.

 

kvkirillov via Getty Images

 

SF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로 구축되고, 그것의 발달로 인해 변화가 추동되는 현대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가장 적확한 방법이 SF다. 문학이 21세기 이후로 실제 삶의 영역에서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큰 요소인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교육과정 초기에서부터 문리文理가 분리되어 있는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SF에서 보여주는 논리적 상상력들은 사고 실험과 지적 반응에 대한 움직임이 활발한 장르다. 현재 인공지능의 위험성들에 대한 우려들이 제기되고, 기술의 발달로 인해 불거지는 새로운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이미 이전 시대에 SF작품들을 통해 사고실험된 바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장르문학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은 현대 한국의 인문학 지형도를 풍성하게 해주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요소들에 대한 발굴과 관심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형성해왔고 지난 100여 년 동안 누적해온 요소들이 대중문화 속에, 그중에서도 장르문학에 다양하게 내포되어 있다. 게다가 다양한 경험의 층위들이 새롭게 분화하고 있는 요즘 이러한 방법론들은 인문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대중들에게 친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론들이다. 이는 단순히 기존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히려는 방법론의 확장이 아니라, 기존 한국문학의 지형도를 해체하고 재편하여 새로운 시대의 경험들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어야 가능할 것이다.

*본 원고는 한국출판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하는 『기획회의』 468호 이슈 ”대중문화 인문학”에 실린 글입니다. 온라인 원본은 한국출판문화연구소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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