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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과 멋진 것

ⓒLeeKyungJun / Imazins via Getty Images
ⓒhuffpost

동네에 대한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우리 동네’, ‘내 이웃’이란 말이 생소하디생소하다. 이제까지 거의 평생 껑충 뛰듯 서울과 서울 주변을 오갔다. 생활은 남의 도시에서, 잠은 버스에서. 동네에 있는 시간이 없으니 사는 곳 근처에 24시 마트나 하나 있으면 족했다. 그런데 1년 전 회사 근처로 이사를 오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다. 눈 떠서 눈 감을 때까지 돌아다니는 지역이 한 동네로 좁혀졌다. 잘 보이지 않던 놀이터가 보이고, 이웃이 보인다. 학교, 체육관, 공공도서관, 산책로가 이제는 눈에 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이 우리 동네다. 직장도, 집도 이 동네에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면 바로 출근이다. 정류장 유진맨숀, 아니 유진상가 앞에 내린다. 요즘 시대에 ‘맨숀’이라니! 이 건물은 1970년 준공되었다. 그 시대엔 ‘타워팰리스’ 같은 것이었다. 국내 최초 주상복합 아파트로 세운상가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튼튼하고 낡고 너무 커다란, 홍제의 유물이다. ‘스타트업’이나 ‘콘텐츠’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이 유물 같은 건물로 우리는 매일 출근한다.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어려움을 겪던 때에 싼 임대료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 입주했다. 예전 유진맨숀은 1층에 상가를 두고 북측, 남측에 5층 아파트가 성벽처럼 들어서 있는 모양이었다. 내부순환로가 건물 위를 지나게 되면서 건물 한쪽 두 층을 뜯어냈다. 그래서 높이가 다른 쌍둥이 건물이 되었다. 주거용으로 쓸 수 없게 된 내부순환로 아래 건물에 우리 같은 스타트업, 중소기업이 입주해 있다. 두 건물 사이엔 중앙 정원이 뚫려 있는데 이곳에서 보면 하늘이 아주 큰 조각으로 잘린다. 이곳에서 가끔 하늘을 본다. 낡고, 여유로운, 2018년의 서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상한 공간이다.

멋지게 표현했지만 처음부터 이 동네를, 이 건물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기본적으로 낡은 것이 싫고 새것이 좋다. 공사 소음도 먼지도 잘 참을 수 있을 만큼 새것을 좋아한다. 뚝딱뚝딱 겨울부터 쌍둥이 건물 중 한쪽만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여름에 끝났다. 새 공간엔 노인회와, 중장년층을 위한 공간, 청년을 위한 공간이 우리 사무실 아래층에 널찍하게 들어섰다. 다 벗겨진 벽면도 눈부시게 하얀 색으로 페인트칠을 했다. 그런데 딱 반쪽만!

딱 반쪽만 새것이 되었다. 이 쌍둥이 건물의 반쪽만. 중앙 정원에서 보면 지식센터 쪽 벽면만 하얗고 아파트 쪽 벽면은 누런 옛 벽 그대로다. 반쪽만 ‘첨단’의 도시 느낌이 나는 파란 유리창을 덧붙였다. 그렇게 반쪽만 2018년에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1970년에 준공된 해괴한 건물이 되었다. 새것 같지만 하나도 멋지지 않다. 이 아파트에서 수십년을 산 입주민은 이렇게 반쪽만 하얗게 칠해진 ‘유진맨숀’을 보며 소외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종로구 세운상가는 메이커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해 도시 정체성을 잘 살린 도시재생 사례로 자리잡았다. 도시 재생은 ‘무엇을 삭제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살릴까’ 고민하는 과정이다. 철학이 있는 도시는 남겨야 할 것을 남기고 그 답은 지역 공동체에 얻는다. 공공성을, 공동체를 고민하는 도시 재생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이 우리가 사는 이곳을 ‘사람 사는 곳’으로 기억하고, ‘내 동네’로 아끼도록 만든다. 왜 모를까? 낡은 것도 멋질 수 있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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