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2018년 07월 21일 14시 48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7월 21일 14시 48분 KST

'새정치 셀럽' 안철수의 7년, 안철수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안철수와 '안철수 현상'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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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안철수 전 의원이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다음달 독일로 출국한다. 7년전 이맘때쯤 ‘청년멘토’로 급부상하며 정치인으로 데뷔했던 때를 생각하면 초라한 퇴장이다. 그의 ‘새정치’는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2015년 말부터 안철수를 취재해온 기자가 ‘정치인 안철수’의 7년을 되돌아본다.

 

“저는 오늘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성찰과 채움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지난 12일 국회 앞 한 카페. 기자들 앞에 앉은 안철수(56) 전 의원(이하 호칭 생략)은 준비해온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6·13 서울시장 선거에서 3위로 패배한 안철수는 이날 정치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2011년 서울시장 출마를 시사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인 지 7년만이다. 7년 동안 한국 정치는 격변기를 거쳤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했다. 제3정당 국민의당이 탄생했고 없어졌다. 그 사이 안철수는 한 번의 당 대표 선거와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한 번의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모두 후보로 직접 뛰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호칭은 없다. 그의 ‘새정치’는 실패했다. ‘정치인 안철수’가 탄생한 2011년 여름부터 지난 12일 ‘2선 후퇴’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실패가 한국 정치에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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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정치인 손잡은 제3당 실험

벌써 7년 전이다. 안철수는 정치권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가 ‘청년 멘토’로 젊은 층의 지지를 한 몸에 받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둔 때였다. 기존 정치와 다른 틀을 만들자는 유권자들의 욕구는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났다. 안철수는 자신보다 지지율이 낮은 박원순에게 후보직을 양보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기성 정치인과 다른 신선함을 줬다.

통합민주당에서 활동하다 이 때부터 그를 돕기 시작한 한 의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안철수는 당시 정치를 시작하면서 사적인 이유보다는 공적 마인드가 누구보다 확실해보였다. 그 점 때문에 그와 함께 하게 됐다.” 의사, 벤처 사업가로 성공을 이루고 부를 축적한 그에겐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명분이 확실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지금은 안철수와 멀어졌다. 당시 그를 도왔던 여러 정치권 인사들처럼 말이다. 2012년 문재인 대선 후보로의 단일화와 2014년 민주당과의 통합을 거치면서 초창기 측근 다수는 그를 떠났지만, 안철수 본인은 정치인이라는 새 직업을 습득해가기 시작했다.

안철수가 본격적인 ‘자기 정치’를 시작한 것은 2015년 12월13일로 평가된다.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장에서 마이크 앞에 선 그의 표정은 비장했다.

“저는 오늘 새정치민주연합을 떠납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절벽 앞에서 저는 지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길을 나서려고 합니다.”

자신의 혁신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며 탈당을 감행한 것이다.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의 결별 선언이었다. 안철수는 훗날 이 때에 대해 “정론관에 걸어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문재인 대표가 나에게 전화해주길 기다렸다”고 말했다. 상대방에 책임을 지운 것이다. 일각에선 “안철수가 이제 좀 정치인이 돼가는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안철수는 정치권에서 사실상 혈혈단신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그는 기존 조직을 깨지도 넘지도 못했다. 안철수의 한 측근은 “그 때의 경험을 통해 안철수는 자기 세력을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탈당 직후부터 안철수는 자신만의 조직을 만드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201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에서 이탈자들이 속출했다. 대개 차기 공천이 불확실한 호남 의원들이었다. 박지원, 정동영 등 ‘구정치인’들이 많았다. ‘새정치’를 내세우던 안철수는 이들과의 결합을 택했다.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이 측근은 “당시 측근 그룹에선 반대가 많았고, 특히 박지원과 손잡는 걸 탐탁치 않아 한 이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는 2016년 3월2일 박지원의 의원회관 방을 직접 찾았다.

2016년 2월 창당된 국민의당이 4·13 총선에서 38석의 제3정당이 된 것은 뒤돌아보면 안철수 정치 인생의 최대 성과였다. 국민의당은 특히 진보 정치의 중심지인 호남을 석권했다. 광주에선 8개 지역구에서 전부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정당득표율이 26.7%에 이르며 더불어민주당(25.5%)을 넘어섰고, ‘6~7번까지만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비례대표가 13번까지 당선됐다. 공천 당시 비례대표 10번을 배정받자 이를 거절해버린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선거 뒤 자신을 ‘김10번’이라고 부르며 아쉬워했다.

이 때의 성과는 안철수에게 강하게 각인된 듯 하다. 안철수는 이후 2017년 대선을 치를 때도, 6·13 지방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이를 반복해서 언급했다. 자신이 “제3당 창당에 성공했고 다당제의 가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할 때 안철수는 두 눈에 힘을 주곤 했다. 대선 패배 뒤 자신이 “700만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주위에 얘기할 때 나타나곤 하는 표정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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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클릭의 대가

‘제3정당’ 정치는 우리 정치에서 여전히 낯선 것이다. 각종 법안과 정책, 인사 문제 등을 두고 진보와 보수가 양쪽으로 나뉠 때 제3정당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곤 한다. 국민의당은 총선을 통해 제3정당으로 입지를 굳혔지만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자장 사이에 낀 채 이슈 선점에서 멀어져 갔다. 국민의당을 향해선 ‘캐스팅보터’라는 호평과 ‘민주당 2중대’ ‘한국당 2중대’라는 비난이 동시에 나왔다. 의원총회에선 고성이 오가는 경우가 잦았다.

안철수는 ‘우클릭’을 선택했다. 특히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조금씩 더 오른쪽을 향했다. 애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대했지만 대선 직전엔 찬성으로 선회했고, 대선 토론회에 나가선 햇볕정책에 대해 “공과 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진보 쪽은 기존 민주당 세력과 그에 대한 지지가 확고한 반면 보수는 탄핵 여파로 흔들리고 있으니 ‘중도·보수의 대표 주자’가 되는 것을 노린 전략적 판단”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최명길, 이태규 의원 등 당내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측근들은 이 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는 당연히 호남 의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박지원 의원은 6·15 남북정상선언을 기리겠다며 의원회관에서 615호 사용을 고수하는 인물이다. 휴대전화 번호마저 ‘0615’로 끝난다. 박지원과 안철수는 건건이 부딪히며 당의 정체성 논란을 키웠다. 유권자들은 국민의당의 정체성이 헷갈렸다. 박지원과의 대립은 안철수에게 어쩌면 각오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우클릭을 지지했던 측근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호남 의원들과의 갈등이 극에 달할 때였는데 그는 꽤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안철수가 언제까지 박지원과 함께 정치를 할 순 없는 것 아니냐. 한 번 거쳐야 할 일이며,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대선 막판 안철수 쪽은 ‘보수’로 분류되는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와의 단일화 논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물밑 논의만 오가다 성사에 이르진 못했다. “빨갱이” 운운하며 강하게 나오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에 비하면 안철수의 보수화는 어정쩡하고 어딘가 어설퍼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효과적으로 구사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 안철수’를 탄생하게 한 젊은 층의 지지가 완전히 떨어져나간 것은 그에게 무엇보다 뼈아팠다.

이런 가운데 안철수를 향해 던져진 ‘엠비(MB) 아바타’ 공격은 대선 경쟁자들 입장에선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에선 “호남에 몸을 두고 있지만 마음은 떠난 가짜 진보”라고, 한국당에선 “얼치기 보수”라고, 그를 비판할 수 있는 함축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대선 선거 운동이 한창일 때 안철수 캠프 관계자는 기자에게 한 ‘단톡방’을 보여주며 울상을 지었다.

“지금 큰 일 났어. 돌아가는 상황이 심각해. 요즘 호남에서 ‘안철수는 엠비 아바타’가 카카오톡을 통해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데 생각보다 파급력이 큰 것 같애.”

며칠 뒤 안철수는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가 정치학 교과서에 실릴 만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 유명한 “제가 엠비 아바타입니까”라는 문장을 반복해 말한 것이다. ‘엠비 아바타가 아님’을 알리려는 의도였지만, 부정적인 단어를 유권자들에 각인시키고 스스로 프레임에 갖혀버린 결과가 됐다.

토론회 뒤 캠프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서로에 대한 책임론이 빗발쳤다. “우리 후보와 캠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부터 읽으며 시작해야 할 정치 초보생 수준”이라는 자조적 목소리가 나왔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 책에서 경쟁자의 프레임을 그 틀 안에서 반박할 경우 오히려 그 프레임이 강화된다고 지적했다.

이 토론회에서 안철수는 유독 초조해보였다. 그는 긴장하면 자신의 엄지 손가락으로 다른 손가락을 계속 문지르는 습관이 있는데 이날 이런 모습이 카메라에 여러 번 잡혔다. 토론회 직후 안철수를 만난 캠프 관계자는 “후보 본인도 이 날을 매우 후회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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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콤플렉스

안철수의 토론을 지켜봐온 당의 관계자는 “안 대표는 (정치인 한 명만 두고 여러 기자가 번갈아가며 묻는 방식인) 관훈클럽 토론회 같은 건 잘 하는데 후보 여럿이 나와 붙는 다자 토론에서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토론회 전 구체적인 수치까지 학습하며 철저한 준비를 하는데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하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원톱’ 창업자 출신인 그의 이력에서 찾는 이도 있고, 다른 사람을 누르고 세게 치고 들어가지 못하는 성격에서 찾는 이도 있다.

단순한 ‘기술 부족’ 문제보다는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는 이들도 있다. 대선 토론 실패의 경우 문재인에 대한 안철수의 감정이 과도하게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정치권에 들어온 뒤 안철수는 늘 문재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안철수는 지난 12일 마지막 기자간담회를 하면서 자신의 정치 입문 날짜를 2012년 9월 19일로 잡았다. 보통 다른 사람들이 그가 서울시장 출마를 예고한 2011년부터 시작해 7년으로 계산하는 것과 달리 그는 “5년 9개월 정치를 하면서”라고 말한 것이다. 2012년 9월 19일은 그가 18대 대선 후보로 출마 선언을 했던 날이다. 이미 석 달 전인 6월17일 문재인은 출마 선언을 마쳤기 때문에 사실상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셈이었다. 그가 항상 문재인을 의식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례다.

당시 후보 단일화 양보를 하고 사퇴한 뒤 안철수는 “문재인을 제대로 돕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그와 주변에선 매우 억울해 했다. 2017년 대선 석 달 전인 2월 13일 광주의 토론회에 참석한 안철수가 문재인을 향해 내뱉은 “짐승만도 못한”이라는 거친 표현은 이런 감정이 누적된 속에서 나왔다. 그즈음 발간된 문재인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왜 (안철수를) 붙잡지 못했냐. 단일화해놓고 미국 가버리는 사람 어디 있냐”는 질문에 문재인이 “제가 안철수 의원이 아니니까 그 이유를 알 수 없죠. 그건 그분 몫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한 것을 보고 폭발한 화가 여과없이 표출된 것이다. 이후 진행된 대선 토론회는 민주당에서 탈당한 뒤 안철수가 사실상 처음 문재인을 다시 맞닥뜨린 자리였다. 안철수는 결국 문재인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 이후 끝없는 내리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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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장애 리더십

안철수에게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다면 정체성 갈등이나 네거티브 공격에 대한 대응이 잘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철수는 리더십에서 취약점을 보였다. 특히 결정을 내리기 전에 주저하는 ‘결정장애’ 문제가 컸다. 대선 패배 뒤 이에 대한 내부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을 주도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김종인 대표는 안철수가 도움을 요청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여러 인사들을 만나며 작업해왔다. 4월 초·중반, 안철수가 김 대표를 두 번 찾아갔지만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다 안철수 지지율이 4월 19일께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철수는 (대선 10여일 전인) 4월 27일에야 급히 찾아가서는 ‘전권을 주겠다’는 얘기를 했다.” 김종인 영입에 대한 캠프 내 찬반이 엇갈리는 가운데 안철수가 빨리 결정을 못했고, 결국 타이밍을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김 전 대표는 결국 4월 30일에 안철수와 손을 잡겠다고 발표했는데 그때는 이미 안철수의 ‘3위’ 가능성까지 거론될 만큼 시기가 늦은 때였다.

대선 때 안철수의 비서실장을 맡았던 송기석 전 의원도 비슷한 지점을 지적했다. 대선 패배 6일 뒤 안철수를 만나고 와서 한 얘기다.

“내가 직언을 했다. ‘리더로서 결단을 내릴 땐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안 후보의 태도와 눈빛을 볼 때 전혀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외려) ‘그런데 왜 조직이 잘 안 돌아갔던 것이냐’고 묻더라. 패배를 초래한 자신의 문제를 모르고 전혀 바닥에 닿지를 않은 것 같았다.”
리더십 부재는 매번 ‘비선 논란’으로 이어지곤 했다. 지난 대선 때는 캠프에서 공식 직책을 맡지 않았던 한 현역 의원과 안철수의 부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에 대해, 지방선거 때는 역시 캠프에서 직책이 없었던 다른 전직 의원에 대해 불만이 제기됐다.

안철수와 가까운 한 비례대표 의원은 리더십보다는 ‘절박감 부재’를 주목했다.

“대선 때 국민의당으로 넘어올지 고민하는 꽤 비중 있는 민주당 중진 의원이 있었다. 안철수에게 그를 만나보라고 주선했는데 결국 안철수가 접어버렸다. ‘다른 당 사람까지 빼와가면서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안철수는 절박감이 부족했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모두 영입을 시도했던 중도 성향의 비정치권 인사가 있었다. 문재인·안철수를 다 만난 뒤 그 인사는 문재인을 택했다. 이후 그 인사를 만났을 때 이유를 물어보니 ‘문재인이 절박감이 크더라’고 하더라.”

결국 3위로 대선을 마무리한 안철수는 5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새 카드를 내놓는다. 바른정당과의 통합이다. 국민의당은 반으로 쪼개졌고, 그의 첫 지역 기반이 됐던 호남은 떨어져 나갔다. 이 때 민주평화당으로 넘어간 한 호남 의원은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4·13 총선에서 호남이 국민의당을 지지한 것은 안철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민주당에게 ‘정신차리라’고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안철수는 호남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정체성에서도 엇나가면서 호남의 지지가 결국 한번으로 끝나는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다.”
역시 평화당으로 간 최경환 의원도 지난 지방선거 뒤 분통을 터뜨렸다.

“안철수는 (4·13 총선 때) 자기 손으로 일군 다당제를 (바른정당과의 통합 및 지방선거 패배로) 자기 손으로 망쳐버렸다.”

바른정당과의 통합은 박지원과의 흔들리던 관계를 완전히 찢어 놓았다. 전략적 동거를 시작한 지 700여일 만인 지난 2월 둘은 결별했다. 한 달여 전 안철수에게 물어봤다.

“박지원과 멀어진 게 맞습니까?”(기자)

“가까웠었나요?”(안철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요.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나요?”(기자)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이 잘…”(안철수)

바른정당과의 통합이 없었다면 국민의당이 ‘호남 자민련’, ‘민주당 2중대’에 그쳤을 것이라면서 안철수의 결정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다. 박지원, 정동영 등 만만찮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철수가 통합을 밀어부치며 결국 관철시킨 것을 두고 “안철수가 정치적으로 한 단계 크게 성장했다”며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적잖다. 하지만 호남이라는 안정적 지역 기반과 완전히 멀어진 데 대해 ‘패착’이라는 평가는 공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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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싸움까지 부른 ‘새정치’

사실 안철수는 불확실한 지지 기반을 상쇄할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새정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안철수는 이 무기에서 점차 멀어졌다. 박지원 등 ‘구정치’와 결합해 희석된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새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 못한 탓이 크다.

안철수는 18대·19대 총선에서 당선된 재선 의원이었다. 국회의원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입법활동이라는 수단이 있다. 입법이라는 확실한 도구를 정치적 입지와 함께 쥐고 있었지만, 그가 국회에서 보여준 것은 많지 않다. 성과는 신해철법(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정도에 그친다. ‘제3정당 대표’로서 안철수는 대안을 제시하거나 원내 합의를 이끄는 등의 성과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국회 입성 초기 안철수는 간담회 때 기자들에게 식사값을 따로 걷어 화제가 됐다. 다른 정치인들처럼 저녁에 폭탄주를 돌리며 ‘당내 화합’을 얘기하는 정치도 하지 않았다. 아예 술을 한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몇가지 ‘잔기술’이 다였다. 이후 안철수는 호남 의원들의 제안에 따라 폭탄주를 돌리고 ‘막걸리 회동’을 하는 등 기성 정치인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앞둔 지난 1월 찬반 세력이 국회에서 몸싸움까지 벌인 것은 ‘새정치 훼손’에 결정적이었다.

이를 두고 그가 2012년 ‘대선 출마’라는 정점에서부터 정치를 시작했고, 이후 목표를 ‘차기’에만 두면서 새정치에 대한 초반의 문제 의식과 정치를 시작한 근본 이유에 대한 고심이 엷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선때 그를 도왔던 한 정치컨설턴트는 이렇게 말했다.

“컨설팅을 시작할 때 출마하는 사람들에게 꼭 물어보는 게 있다. ‘무엇을 하겠느냐’가 아니라 ‘왜 하려고 하느냐’다. 그것이 그 사람이 누구를 위해서 정치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철수는 ‘왜’를 물어보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새정치와 멀어졌다는 평가를 의식한 듯 안철수는 서울시장 선거 때 “초심”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초심이 전혀 변하지 않았고 정치권에서 추진력과 돌파력을 다 증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양쪽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했다”며 그는 억울해 했다.

그의 항변과 달리 새정치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으로 남아있다. 바른미래당의 한 당직자는 이런 말을 했다. 지난 지방선거 선거운동 마지막날 뒷풀이 자리에서 한 얘기다.

“우리 당에서 안철수의 새정치만큼이나 모호한 게 있다. 바로 유승민의 개혁보수다.”

유승민 비판에 무게가 실린 표현이지만 안철수의 새정치 역시 여전히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민주당과 한국당 사이 ‘다른 길’을 구사하려던 안철수와 유승민이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내부 당직자조차 모르는 걸 유권자들이 알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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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셀럽은 안철수가 아닐 것”

“허무하다.”

안철수가 “일선에서 물러난다”고 밝힌 날 만난 바른미래당의 한 당직자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총선, 대선, 지방선거를 쉼 없이 달려왔는데 지지율 6~7%의 바른미래당만 남은 데 대한 푸념이다. 안철수와 ‘안철수 현상’ 7년이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은 허무함밖에 없는 것일까. 한때 국민의당에서 안철수를 지원하다 지금은 떠난 한 인사는 “남긴 게 있긴 하다”고 말했다.

“안철수가 현 정권 탄생에 조금은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이 바짝 긴장을 하고 호남 민심을 잡기 위한 노력 등 분발을 했다. 안철수 개인만 본다면 남은 게 없는 정치 여정이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메기효과(경쟁자의 등장이 다른 경쟁자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효과)라고나 할까.”

다른 인사는 ‘과제’를 남겼다고 했다.

“안철수는 새정치를 들고 나타났지만 결국 실패하고 떠났다. 그만큼 새정치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새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갈망은 여전하다. ‘안철수 7년’은 새정치가 한명의 스타 정치인으로 되는 게 아니라 법과 시스템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 개혁 입법 등은 이제 정치권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과제다.”

안철수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도 ‘과제’를 얻은 듯 했다.

“안철수의 새정치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 새정치는 기존의 대립적 양당 체제를 넘어 협치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념이 아닌 가치다. 안철수 없는 바른미래당이 이제 인물에 의존하지 않고 중도 개혁과 민생의 가치로 다당제를 지키고 국민 지지를 받아낸다면, 그 이후 안철수가 돌아온다면 대선 후보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승용 전남대 교수(정치학)는 “제3정당 실험이 7년을 간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평가했다. 안철수 싱크탱크 ‘미래’의 대표를 맡으며 그를 지근거리에서 지원했던 인물이다.
“김대중, 박찬종, 정주영, 정몽준, 문국현, 안철수로 이어진 셀럽(유명인) 정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셀럽에 기댄 정치보다는 노선과 이슈에 기초해 세력화하는 정치가 이론적으로는 100% 옳지만 쉽지가 않다. 한국 정치가 직면한 문제들이 ‘안철수 현상’에 들어가 있고 이는 안철수 지지 여부를 떠나 모두가 풀어야 할 문제다.”

오 교수는 그러나 “다음 셀럽은 안철수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가 변하면 부르는 일꾼도 달라진다. 안철수가 등장했던 7년 전과 지금, 내년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안철수 역시 제3세력에서 이미 하나의 기득권이 됐다. 시대적 부름에 더 이상 최적화돼 있지 않다.”

오 교수는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싱크탱크 미래는 오는 23일 해산 총회를 한다.

12일 안철수는 ‘정계은퇴’를 끝내 언급하지 않았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성찰과 채움의 시간을 갖겠다”에서 방점은 ‘채움’에 찍혀 있었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하지 않았는데 먼저 나서 “첫 방문 나라를 독일로 정한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다. “4차 산업혁명”과 “통일”을 배우고 오겠다는 안철수의 표정에서 패잔병의 씁쓸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의 시선은 이미 다음 대선 도전에 닿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측근들도 은퇴가 아닌 ‘2선 후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측근은 “국민이 불러주시는 때가 있을 것”이라며 “그 때 돌아오면 된다”고 말했다. 이 ‘국민의 부름’은 안철수가 바라보는 지점이기도 하다. 지난 4월 서울시장 출마선언을 하며 그는 “7년 전 가을, 저 안철수에게서 희망을 찾고 싶어 하셨던 그 서울시민의 열망에도 답하지 못했던 기억 또한 지금도 생생하다”고 강조했다. 안철수는 차기 복귀의 명분을 그 지점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안철수는 과연 국민의 부름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그는 다음 달 독일로 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