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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이 쫓아낸 아이 마히아는 "내 나라 한국"이라 말한다

대답 없이 고개를 떨궜다

  • 박세회
  • 입력 2018.07.20 21:55
  • 수정 2018.07.21 11:04
미등록 이주노동자 부모한테서 태어나 8살까지 무국적으로 살다 2013년 한국을 떠났던 마히아(13)가 12일 (현지시각) 방글라데시 다카 집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평화원정대가 선물한 한국 시절 자신의 사 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부모한테서 태어나 8살까지 무국적으로 살다 2013년 한국을 떠났던 마히아(13)가 12일 (현지시각) 방글라데시 다카 집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평화원정대가 선물한 한국 시절 자신의 사 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Hankyeore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사랑하는 세발 오토바이 ‘톰톰’이 통통거리며 신나게 질주한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담벼락과 스칠락 말락 방향을 돌릴 때마다 몸 가누기조차 버겁다. 기사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10년 만에 마히아를 만나러 가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걸까. 마히아에게 주려고 준비한 선물 꾸러미가 떨어질세라 꽉 움켜쥐었다.

지난 12일 오후 다카 남부 변두리 지역 쇼니르 아크라의 질퍽한 골목길을 20여분 내달린 톰톰이 가쁜 엔진 숨결을 가다듬으며 한 단층집 앞에 <한겨레> 평화원정대를 내려놓았다. 한국이 고향이고 여전히 자신이 방글라데시계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방글라데시 음식보다 한국 음식을 더 좋아하는 마히아네 집이다.

“네가 마히아구나.” 수줍은 표정의 한 소녀가 살며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젖살로 볼이 통통하던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니다. 머리를 짧게 자른 탓에 소년티마저 난다. 10년 전인 2008년 말 <한겨레21> 표지이야기 기사에 실렸던 사진을 선물로 건네자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아저씨 기억해요?” 마히아가 대답 없이 고개를 떨궜다.

2008년 12월 742호 표지 ‘아프지 마라, 마 히아’.
2008년 12월 742호 표지 ‘아프지 마라, 마 히아’. ⓒHankyeore21

마히아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12월 크리스마스이브 경기도 마석가구공단에 있는 ‘샬롬의 집’(관장 이정호 신부) 보육실이다. 석달짜리 관광비자로 들어와 10년째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눌러앉은 아빠 목터 후세인(40)과 엄마 아키 지누크(34) 사이에서 태어난 마히아의 고향은 서울 망우동에 있는 ㅈ산부인과다. 두 사람은 자연분만을 잘한다는 지인의 소개를 받아 이 산부인과로 갔다.

 이번에 마히아에게 건넨 또 다른 선물은 한국 과자와 라면을 비롯한 한국 음식과 재료들이다. 마히아 표정이 훈훈해 보인다. “마히아가 아직도 한국 음식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방글라 음식은 싫어해요. 방글라에서도 한국 마트에서 재료 사와 갈비탕, 닭갈비, 닭도리탕 해줘요. 근데 비싸요.” 마히아 엄마 지누크가 또렷한 한국말로 말했다.

 마히아는 세살 때 이미 김치를 사랑하고 떡볶이와 어묵, 자장면, 해장국이 없으면 못 사는 ‘정통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국적조차 없는 마히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히아는 한국에 체류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의료체계에 다가갈 권리조차 얻을 수 없었다. 차별받는 무국적 아동 마히아의 이야기를 담아 <한겨레21> 표지이야기 ‘아프지 마라, 마히아’를 썼다.

마석가구공단에서 8년을 자란 ‘국제 미아’ 마히아는 2013년 5월 결국 엄마 손을 잡고 방글라데시로 떠났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였다. 엄마 지누크는 마히아와 같은 ㅈ병원에서 태어난 동생 윤피 손을 잡고 공항 출국장을 나섰다. 죄 없는 아이들이 한국에서 ‘무국적 불법체류자’의 삶을 이어가게 하고 싶지 않은 부모들이 내린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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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마히아 “내가 태어난 한국으로 돌아가고파” 눈물

당시 경기 수동초 녹촌분교 2학년생 마히아는 “방글라데시 말도 모르고, 친구하고 헤어지는 것도 싫어요. 계속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으나 비행기를 타지 않을 순 없었다.(<한겨레> 2013년 5월9일치 1면 참조) 아빠 목터도 이듬해 강제단속과 추방의 공포에 떨던 16년간의 고단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이 있는 다카로 갔다.

2013년 5월8일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을 떠나는 마히아의 모습을 실은 이날치 <한겨레> 사진.
2013년 5월8일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을 떠나는 마히아의 모습을 실은 이날치 <한겨레> 사진. ⓒHanicokr

마히아 부모는 벵골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마히아를 위해 개인교사를 붙여줬다. 지누크는 “마히아가 ‘나, 방글라 말 못해’라며 엄청 울었어요. 그래서 방글라 말 밑에 한글로 발음을 적어주며 벵골어 가르쳤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마히아가 지금은 집 근처 사립중학교 2학년생 102명 가운데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며 목터와 지누크는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마히아는 대신 한국말을 많이 잊은 듯했다. 이날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렀다는 그는 “영어 시험은 다 맞힌 것 같아요. 자신 있어요”라고 또랑또랑한 벵골어로 말했다. 어릴 적엔 자신처럼 가난한 어린이의 병을 고쳐주는 소아과 의사가 되는 게 꿈이라던 소녀는 인생의 목표를 바꿨다.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는 게 매력적”이라며 항공기 조종사를 새 목표로 정했다고 한다.

마히아 부모의 최대 관심사도 아이를 키우는 여느 부모들과 다르지 않았다. 교육 문제다. “마히아 지금 영어랑 수학 학원 다녀요. 사립중학교에 학원까지 하면 한달에 20만원 들어요. 사립학교 더 비싼 데도 있는데, 못 보내요. 아빠가 일을 안 하니까.”

목터는 2014년 귀국하자마자 한국에서 번 돈으로 신발가게를 냈으나 3년 만인 지난해 접었다. “한국에서 공장 일만 하고 장사해본 적이 없어 망했어요.” 그래도 마히아네는 이 동네에선 먹고살 만한 축에 든다. 마석가구공단에서 목터가 힘들고 건강에 좋지 않은 도색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지금 사는 집은 물론이고 다카 번화가의 대형 상가에 점포도 하나 갖고 있고, 집 인근엔 방 4개짜리 집을 세놓아 한달에 10만원가량 임대료도 받는다. 현재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있는 목터를 향해 지누크는 다시 마석가구공단에 돌아가 일하라고 채근하는 분위기이나, 이미 한국에서의 불법체류 경력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이다.

ⓒHankyeore

마히아에게 물었다. “한국을 떠나던 때를 기억해요?” 질문을 던진 건 실수였다. 마히아 눈에서 눈물이 펑 터졌다. 그러곤 멈출 줄을 몰랐다. 한참 만에 숨을 고른 마히아가 말했다. “녹촌분교, 그리고 거기서 함께 공부하던 정선이, 그리고 다른 친구들 생각 많이 나요. 한국이 그리워요. 한국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내 나라이니까….”

한국을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마히아와 달리 한국은 여전히 마히아 같은 아동에게 참으로 야박한 나라다. 이들에게 부분적으로 교육과 의료의 권리를 주거나 체류 자격을 주는 데 인색하다. 이주아동 권리 보장에 관한 법률안은 새 국회가 시작될 때마다 누군가 제출하고 임기 만료와 함께 자동폐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19대 국회 때도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이 마히아처럼 일정 요건을 갖춘 이주아동에게 특별체류 지위를 인정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법률 제정안을 냈으나 자동폐기됐다. 마히아가 한국을 떠날 당시 전국에 4000명 정도 미등록 이주아동이 있는 것으로 현장 단체들은 추산했다. 공식 통계는 없다. 제도 개선도 없었다.

불법입국자에 대해 초강경책을 펼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부모를 따라 밀입국한 미성년 자녀를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격리 수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가 한달 만에 폐기했다. 한국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사랑하는 마히아 같은 아동에게 내줄 자그마한 곁조차 없는 것일까? 우리 안의 마히아마저 내쫓는 상황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난민들에게 배타적인 건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일까? 해 질 녘 마히아 집을 나서는 ‘단일민족 국가’ 국민의 머릿속에선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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