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홀로 깨어 있는 자와 포스트잇 하나

ⓒ뉴스1
ⓒhuffpost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대표적인 이탈리아 기행문으로 꼽히지만, 괴테가 묘사한 이탈리아는 무질서하고 방탕하고 더럽고, 그러나 예술은 위대한 기이한 모습이다. 괴테가 보기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무질서하고 분별이 없어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하나의 개인이라기보다 머리가 두개가 되었다가 세개도 되는 ‘괴물’ 같은 거대한 뭉텅이에 가깝다.

글 곳곳에서 괴테는 ‘합리적인 독일’과 ‘무질서한 이탈리아’를 은근히 비교하는데 이는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서 인종적 차이가 ‘문화’적 차이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사태와도 닿아 있다. 또 이런 문화적 차이로 합리화되는 인종적 편견이 실은 “깨어 있는 자”와 “몽매한 대중”에 대한 구별과 밀착되어 있음을 <이탈리아 기행>은 잘 보여준다. 괴테가 보기에 위대한 예술작품인 콜로세움은 이 괴성을 지르는 괴물 무더기를 온전히 담아내고, 콜로세움의 예술적 형식에 의해 괴물은 비로소 잠시나마 인간의 꼴을 간신히 갖추게 된다. “이탈리아에는 도둑이 많지만, 콜로세움은 위대해!”라는 인종차별적 발언과 예술에 대한 찬양이 모순 없이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게 모두 괴테의 책임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괴테보다는 톨스토이를 더 흠모했던 조선의 지식인 이광수도 경성에서 평양을 오가는 ‘진리를 찾는 여행’의 끝에서 문득 “모두 잠들어 있는데 홀로 깨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머리가 둘이 되기도 하고 셋이 되기도 하는 괴물인 대중은 저 멀리, 그곳에 실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잠들어 있는데 홀로 깨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 순간 창조된다. 판단력이 없이 우우 몰려다니며 알 수 없는 괴성을 질러대는 괴물은 바로 그런 “홀로 깨어 있는 자신”이라는 주체의 자리를 위해 매번 창조되고 ‘발견’된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근대 체제 수백년의 역사는 바로 이런 창조와 발견의 과정이었다. 엘리트에 의한 대중의 지배는 지금까지도 여전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두가 모두를 괴물로 ‘발견’하고 자신의 깨어 있음을 창조하는 식으로 형태가 변했다.

신문 사설과 ‘오피니언 리더’들은 수백년간 ‘홀로 깨어’ 무지몽매한 대중을 꾸짖고, 소셜미디어에는 저마다 깨어 있는 자들이 누군가를 향해 꾸짖고 있다. 깨어 있는 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자이다. 이 자리를 만드는 기술은 수백년간 전수되어 도통 변화되기가 힘들다. 문득 세상이 괴물로 가득 찬 것 같다면, 세상 탓만 할 일이 아니라 그걸 발견한 자신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문과 소셜미디어에 온통 괴물을 고발하는 말로 넘쳐난다. 괴물의 정체가 아니라, 곳곳에서 괴물을 발견하는 깨어 있는 자의 ‘명민함’을 되돌아볼 때이다.

글을 쓰는 엘리트로서 언제나 자신에게 되묻곤 한다. 나 역시 “모두 잠들어 있는데 홀로 깨어 있다”는 자의식에 탐닉하고 있지 않나? 자기성찰보다 나를 정신 번쩍 차리게 만든 것은 강남역 출구를 가득 덮었던 포스트잇 더미였다. 그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와 깨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포스트잇 하나를 더 보태어 슬픔을 나누고 더는 그런 슬픔이 없는 세상을 향한 염원을 나누었다. 누구나 ‘깨시민’이 되어 자각한 자로 목소리를 키우는 시대, 이름도 명성도 남기지 않는 하나의 포스트잇으로 남는 일은 너무나 다른 선택과 결단이다.

나에게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그런 배움을 얻는 자리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로서의 글쓰기도 그러면 좋겠다. 홀로 깨어 있음을 증명하는 글이 아니라, 슬픔을 나누고 다른 세상에 대한 염원을 나누는 하나의 포스트잇으로 남는 그런 글이 되고 싶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긴 역사가 ‘깨시민’의 역사와 다른 길을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