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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7월 20일 10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7월 20일 10시 52분 KST

옳은 시위와 틀린 시위

huffpost

“블레어는 살인마.” 그것이 문구였다. 영국 살던 시절 동네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해 런던에 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반전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다. 당시 9살 정도 먹은 친구 아들은 “블레어는 살인마”라는 팻말을 직접 만들어 들고 시위에 함께 나섰다. 멋진 팻말이었다. 친구 아들은 의기양양했다. 그에게는 생애 처음 참가하는 시위였다. 내 친구는 50대의 대안학교 교사였다. 1960년대 온갖 인권시위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플라워 제너레이션’(1960년대 반전, 반산업주의, 평화, 뉴에이지 운동을 하던 세대. 시위에 꽃을 들고 나왔다.)으로서, 그는 아들의 첫 시위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블레어는 살인마인가

수많은 사람이 영국 곳곳에서 런던으로 왔다. 그렇게 거대하면서도 자생적인 시위는 본 적이 없었다. 2003년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경험한 시위라곤 오로지 대학가 앞에서 매캐한 최루탄 연기에 눈물을 찍어내리는 1990년대의 시위밖에 없었다. 노무현 탄핵 반대 시위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 벌어진 몇 번의 자생적 촛불시위 시대는 아직 오기 전이었다. 나는 “블레어는 살인마” 팻말을 든 친구 아들의 손을 잡고 “블레어는 살인마!”라고 외치며 길을 걸었다.

누군가 다가왔다. 반전시위에 참여한 50대 교수였다. 그는 친구 아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 같은 친구와 함께 시위에 참여해서 영광이다. 하지만 나는 블레어가 살인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교수는 친구 아들과 눈높이를 맞춰 앉은 채 어떠한 강압적인 태도도 없이, 진심으로 토론을 시작했다. ‘나의 권위로 너의 의견을 바꾸겠다’는 기운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자생적 시위에서 벌어지는 자생적 세대 간 토론을 보며 나는 벅차올랐다.

박근혜를 탄핵시킨 촛불시위는 하나의 통합된 움직임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바른미래당 지지자, 정의당, 녹색당 지지자가 있었다. 문재인 지지자, 이재명 지지자, 안철수 지지자가 있었다. 자유한국당 지지자도 있었다. 홍준표 지지자도 있었을지 모른다. 좌파가 있었고 우파가 있었다. 중도가 있었다. 진보가 있었고 보수도 있었다. 페미니스트인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다.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을지언정 세밀한 목적은 달랐을지 모른다. 자생적 시위란 그런 것이다. 명확한 깃발을 휘날리며 항상 듣던 진군가를 틀고 확성기로 사람들을 규합하지 않아도 시위는 수많은 다른 의견과 태도를 안고 나아간다.

지금 모두가 ‘혜화역 시위’를 이야기한다. 옳은 시위와 틀린 시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쎄, 어떤 시위가 옳은 시위인가?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때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 지적했다. 그리고 고쳐나갔다. ‘년’이란 말은 서서히 구호에서 사라졌다. ‘미쓰 박’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아닌가를 두고 토론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지시에 의해 토론되고 고쳐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근혜에게 ‘년’을 붙여야 하는가

우리는 나이, 정치적 성향, 정체성에 관계없이 시위에 참여한 서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블레어가 살인마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나는 박근혜에게 ‘년’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네 생각은 어때?”라고. “나는 그런 극단적인 혐오 표현에는 찬성하지 않아. 네 생각은 어때?”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는 곧 오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한국의 시위는 지난 시위의 역사와 결별하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중이다. 덜컹덜컹 불협화음을 내면서도 진화하고 있다.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