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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위하여!

ⓒhuffpost

나는 그들을 어느 시골 성당에서 만났다. 제주도의 남쪽, 모슬포 근처였다. 나는 학회 참석차 제주를 찾았고 그들은 전쟁의 참화를 피하여 제주로 왔다. 고국 예멘에서 지구의 반쪽을 돌아 드디어 제주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친형이 후티 반군에 총살을 당하고 나서 부랴부랴 망명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를 포함하여, 내가 만난 예멘 난민 6명은 다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왔다. 교통이 마비되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매일같이 사우디아라비아의 폭격기들이 도시와 마을들을 무차별 폭격하는 상황에서 가족들과 함께 피란길에 오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가족들과의 연락이 이제는 그들에게는 정신적 생명줄이 되어 버린 듯, 인터넷이 안되는 곳에서 그들은 엄청나게 불안해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화제는 자연스럽게 현 예멘 상황으로 옮아갔다. 내가 만난 난민들의 기본 입장은 ‘중립’이었다. 수니파 이슬람 신도이며 남부 출신인 그들은, 북부 시아파를 기반으로 하는 후티 반군에 대한 반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한데 ‘합법 정부를 지원한다’는 핑계를 대고 예멘 사태에 군사적으로 간섭한 사우디와 미국에 대해서도 그들의 입장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사우디 공군의 융단폭격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져 가는 상황에서 매우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그들 중에서는 남예멘 시절, 즉 1990년 이전의 ‘현존 사회주의’ 지향적 국가 주도의 개발 시대에 대한 향수를 품은 이들도 있었지만, 일단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기본적 질서의 회복, 의회 민주주의 발전은 그들의 가장 큰 희망으로 보였다. 외세들이 조종하는 대리전이 되어 버린 내전이 종식될 때까지 외국에서 머물다가 그다음에 꼭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그들은 말했다. 당분간 망명의 목적은, 내전의 어느 쪽에도 징병이나 정치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또 다른 모습들을 떠올렸다. 바로 1950년 6·25가 터졌을 때 망명을 떠나 난민이 되어야 했던 한국인들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세계적인 한국사 전문가로 성장한 이 땅 제주 출신인 강재언(1926~2017)의 얼굴도 빼놓을 수 없다. 강 선생님은 1950년 동해를 건너가 ‘재일조선인’이 되어 그다음 남은 평생을 분단된 조국이 아닌 일본에서 보냈다. 그는 한 기고에서 자신의 도일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한국전쟁 직후다. 나는 서울에서 내 고향 제주도의 4·3 사건과 그 후의 학살극을 알고 있었다. 당시 25세의 나는 도저히 이승만 정권을 지키기 위해 총질을 할 생각은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인 강 선생님은 그때만 해도 이념적으로 북한 쪽에 더 가까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고향 제주를 시체 더미로 만든 학살자 이승만을 위해 싸울 생각은 더욱더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강 선생님은 그렇게 해서 68년 전에 일본에서 난민이 되었다. 그런데 국제 대리전이 되고 만 한국의 내전에 참전하고 싶지 않아 외국에 가서 난민이 된 것은 과연 강 선생님뿐이었을까.

전혀 아니다. 6·25의 비극은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을 국제 난민으로 만들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잘 알려진 사례는 바로 1975년에 스톡홀름대에서 스칸디나비아 최초의 일본학 전임교수가 된 저명한 언어학자 조승복(1922~2012)이다. 간도에서 태어난 조선 지성인 조승복은, 6·25가 터졌을 때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강재언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단순한 자유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조승복이었지만, 강재언과 마찬가지로 그는 동족상잔의 현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립’을 택한 그의 반전평화 활동은 미국에서 추방으로 이어졌지만, 스웨덴의 진보사회는 그에게 학습과 연구, 교수의 길을 열어주었다. 별세할 때까지 남북 사이의 엄격한 ‘중립’을 지켜온 조승복은 남쪽도 북쪽도 방문하는 등 분단된 조국과 호흡을 같이했지만, 분단이 지속되는 바람에 통일된 조국에서 여생을 보내려는 그의 의지는 실천될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면 전쟁이 종식되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지금 믿고 있는 제주의 예멘 난민들은, 과연 그들의 희망대로 평화를 되찾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난민들과의 대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반도의 1950년과 예멘의 2018년을 비교해보려는 생각을 나는 계속 지울 수가 없었다. 후티 반군을 지원하는 이란을 1950년의 소련이라고 생각하고, ‘합법 정부 지원’을 명분으로 해서 예멘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사우디를 1950년의 미국이라고 생각한다면 68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대리전과 오늘날 예멘의 대리전은 정말로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예멘이나 한반도는 지역적 요충지이며, 양쪽은 똑같이 열강의 식민주의와 인접 강대국의 간섭에 시달려 왔다. 심지어 68년 전에 한반도의 미군에 무기를 공급했던 일부 미국 업체들은, 오늘에 와서도 예멘의 사우디군에 무기를 공급하면서 계속해서 그 배를 살찌우고 있다. 동병상련의 염을 충분히 가져볼 수 있는 상황인데, 과연 이렇게도 많은 한국인들이 예멘 난민들에 대해 극히 비이성적이며 비인도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뉴스1

물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서구 같으면 특히 중동권 난민에 대한 거부 반응은 많은 경우 유럽의 해묵은 기독교적 이슬람 혐오증에 기인한다. 제국주의 침략 과정에서 오리엔탈리즘의 형태로 이데올로기화된 이 혐오증은, 지금도 구미권 극우 정객들에 의해서 쉽게 동원, 이용된다. 한국의 경우도 구미권 본위의 세계관을 지닌 친구미 엘리트들이 여태까지 다수에게 강요해온 이슬람이나 중동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 문제된 예멘만 해도 인류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이지만, 과연 한국의 세계사 교과서에서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전통을 매우 독특하게 융합시킨 고대 예멘의 힘야르 왕국(기원전 2세기말~기원후 6세기말)에 대한 언급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1839년부터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그러나 가열찬 항영투쟁의 끝에 1967년에 독립한 남예멘의 독립운동사나 1990년까지 이어졌던 남북 예멘 분단과 대립의 비극에 대해 같은 분단국인 한국의 교육체계는 과연 학습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지식을 전달해 왔는가. ‘세계화’, ‘세계화’라고 하지만 실은 한국의 교육이나 미디어 속의 ‘세계’는 구미권과 동아시아권으로 국한되어 있다. 한국은 구미권이나 일본과 달리 제국주의적 역사를 갖고 있지 않아도 한국의 주류적 학지(學知)는 제국주의 열강의 표준적 앎의 체계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에서 ‘세계화’는 과거의 ‘반공’을 대체한 새로운 ‘국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시야를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세계’ 전체로 넓힌다는 거야 꼭 나쁠 건 없지만, 문제는 한국 국가와 자본이 주도해온 세계화의 형태다. 한국의 지배자들은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득이 되는 ‘세계화’만을 원한다. 수출 시장과 원료 공급처의 확보, 한류 등을 통한 특히 아시아에서의 문화적 헤게모니 쟁취, 그리고 영어 구사력이나 구미권 학위 등을 통한 한국 상류층의 문화자본의 지속적 축적 등은 그들이 생각하는 ‘세계화’의 전부다.

이와 반대로 난민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약자들과의 연대를 지향하는 세계화는 한국 민중의 이해관계에 궁극적으로 합치될 것이다. 한국의 약자들도 밖에 나가면 그런 국제연대의 덕을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추구하자면 한국 민중은 일단 지금 난민들을 둘러싼 대중적인 히스테리부터 진정시킬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민중을 위한 세계화는 바로 세계 곳곳에서 제국주의 전쟁이 난민으로 만든 해외 형제자매에 대한 연대와 배려에서부터 시작된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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