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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기말시험지 유출은 마치 '007 작전'처럼 이뤄졌다

경찰 수사가 확대되고 있다.

  • 허완
  • 입력 2018.07.17 22:03
ⓒturk_stock_photographer via Getty Images

지난 2일 오후 6시30분 광주 ㄷ고교 행정실장 ㄱ(58)씨는 남구 노대동 거리에서 승용차를 세운 채 학교운영위원장 ㄴ(52·여·의사)씨를 만났다. ㄱ씨는 차에서 ㄴ씨에게 ㄷ고교 기말시험 9개 과목 시험지가 든 봉투를 건넸다. 이날 오후 5시30분 ㄱ씨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행정실에서 인쇄실에서 원본 시험지를 빼내 복사한 것이다. ㄱ씨와 ㄴ씨는 전날인 1일 노대동 한 카페에서 만나 30분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경찰은 “ㄴ씨가 먼저 행정실장에게 시험지를 빼달라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똑같은 수법으로 지난 4월에도 ㄱ씨는 ㄴ씨에게 중간고사 전 과목 시험문제를 건넸다.

광주 사립학교 고3 시험지 유출 사건을 수사중인 광주서부경찰서는 17일 “ㄱ씨가 근무하는 행정실과 학부모 집, 두 사람의 차량 등을 압수수색해 차량 블랙박스와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확보해 분석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또 행정실장 ㄱ씨와 그 배우자, ㄴ씨와 그 배우자 등의 금융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ㄴ씨는 아들을 의대에 보내기 위해서라는 범행 동기가 분명하지만 행정실장은 왜 그랬는지 불분명한 상태”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시험지 유출 대가로 금품을 건네거나 받은 적이 없다고 진술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경찰은 이 사건의 또 다른 조력자나 관련자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중이다. 의사 엄마 ㄴ씨는 이 학교 이사장 부인과 여고 동문으로 2년 여 전부터 동창회 골프모임에서 친밀하게 지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 발생 후 ㄴ씨가 이사장 부인과 통화한 적은 있지만, 사건 전에 통화한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ㄱ·ㄴ씨 등의 휴대전화 통신내역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ㄱ씨는 경찰에서 “학교 운영위원장인 학부모의 영향력과 학부모의 딱한 사정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경찰의 수사는 그 딱한 사정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ㄴ씨는 의사인 남편과 함께 개인 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17일 '광주 고3 시험지 유출 사건'을 수사하는 광주 서부경찰서 소속 수사관이 사건이 발생한 광주 D 고등학교에서 갖고온 압수품을 담당팀으로 옮기고 있다. 
17일 '광주 고3 시험지 유출 사건'을 수사하는 광주 서부경찰서 소속 수사관이 사건이 발생한 광주 D 고등학교에서 갖고온 압수품을 담당팀으로 옮기고 있다.  ⓒ뉴스1

 

ㄷ고와 학교 재단은 이번 사건으로 학교 이미지 실추 등을 우려하고 있다. 학교 재단 쪽은 “이번 시험문제 유출 사건에 재단 쪽 인사나 재단 가족 등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30여년 째 이 학교에서 근무중인 행정실장 ㄱ씨는 재단 관계자에게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 고위 관계자는 “시중에 각종 소문이 난무해 억울하다. 오히려 재단 이사장 부인은 동문인 ㄴ씨에게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경찰이 이번 사건의 범행 동기를 낱낱이 수사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시험지 유출 사건이 드러난 것은 역설적으로 ㄴ씨의 치밀함 때문이었다. ㄴ씨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활용해 ㄱ씨한테 건네받은 복사본을 다시 한글파일로 ‘짜집기본’을 만들었다. ㄴ씨는 아들 ㄹ군이 유출된 시험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너네 학교 족보(기출문제)”라고 건넸다. 아들은 1학년 땐 1등급일정도로 성적이 좋았지만, 2학년 때 2등급 수준으로 떨어져 의대 진학이 힘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시험 정보를 건네받은 아들 ㄹ군은 6·9·10일 치러질 기말시험을 준비하던 친구들에게 수학·고전·생물 과목 정보를 슬쩍 귀띔해줬다. 그런데 아들 ㄹ군 친구들은 실제로 기말시험에서 서술형 문제까지 똑같이 출제되자 깜짝 놀라 학교에 이 사실을 알렸다. ㄷ고교는 지난 11일 광주시교육청에 시험문제 유출 의혹 사실을 알렸다.

경찰은 ㄱ씨와 ㄴ씨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입건해 조사중이지만 아들 ㄹ군의 입건 여부는 미지수다. 경찰은 “만약 ㄹ군이 엄마가 유출된 시험지를 짜집기한 것인지 모르고 공부했다면 입건할 수 없다”며 “설령 이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수험생이 우연한 기회에 시험지를 입수해 시험을 본 사례와 관련해 ‘수험생의 궁박한 사정에 비춰 무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ㄴ씨는 학교에 아들이 자퇴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하지만 일각에선 “ㄴ씨 아들이 자퇴하면 퇴학과 달리 3학년 1학기 성적만 무효가 돼 내년 3학년으로 복학하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이 가능할 수 있다.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온 뒤 학교 교칙에 따라 자퇴와 퇴학 여부를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편 ㄷ고는 16일 9개반 300여 명의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재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하지만 학교는 시험지 유출이 확인된 중간고사는 ㄹ군의 성적만 0점 처리할 뿐 재시험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 ㄷ고 관계자는 “사관학교 등의 전형이 진행되기 때문에 늦어도 7월28일까지는 3학년 1학기 성적처리가 마무리돼야 한다. 중간고사 재시험은 현재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교육청은 광주시내 52개 학교를 대상으로 시험지 관리상황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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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