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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크리스천들에겐 문제가 있다. 나도 당신도 문제가 있다

크리스천들이여, 솔직해 지자.

ⓒleolintang via Getty Images

크리스천들이여, 솔직해 지자. 비교적 예측이 불가능한 신에 대한 믿음을 지닌 미국 크리스천들은 누군가 우리의 종교에 의문을 품거나 비판할 때면 놀라울 정도로 예측 가능한 방어 패턴을 보인다.

LGBTQ가 교회 트라우마에 대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면, 누군가 끼어들어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다르다고 말한다. 내가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 그들은 내게 이메일을 보내 자신은 예외라든가, 자기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든가 설명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승리에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큰 역할을 했지만, 다른 백인 크리스천들은 자기는 힐러리 클린턴을 찍었다, 자신의 기독교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전반적인 ‘당신들’, 혹은 지금 경우라면 ‘크리스천들’을 향한 비판을 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어서 “모든 크리스천이 그런 건 아니다”는 말을 반복한다.

“모든 크리스천이 그런 건 아니다”는 기독교의 문제적 면들이 전반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대한 대화를 탈선시키고, 이 비판은 예외적 개인들의 문제에 대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려는 방해 전략이다. 끔찍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일을 해낸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수동적 외침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속한 역사의 복잡하고 미묘함을 감당할 수 없는 크리스천 개인들은 자신들이 무엇과 관련된 것으로 보여지길 바라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기독교를 믿는다고 편한 마음으로 주장하지만, 그의 활동이 필요하게 했던 인종 폭력의 조건들에 대한 책임은 재빨리 떠넘겨 버린다. 해외로 가는 전도사들에 대한 칭찬 기술엔 통달했지만, 우리의 호의가 의심받을 때는 방어적이 된다.

신발 한 켤레가 팔릴 때마다 어린이에게 한 켤레를 기증하는 TOMS 슈즈에서 신발을 사지만, 경제적으로 국내외 어린이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기독교 산업체 TOMS를 인정하려 들지는 않는 사람들도 있다. 기본적으로 크리스천들은 양쪽에서 좋은 점만 취하려 든다. 우리 역사에서는 기분좋고 고귀한 것만 남기고, 우리 신앙의 본질적 성격 때문에 우리가 압제 시스템, 구조, 조직의 일부라는 점은 부정한다.

미국에서 크리스천이란 종교적 정체성 못지 않게 굉장히 정치화된 사회적 정체성이기도 하다. 크리스천을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따르는 사회적 특권을 가지는 동시에 ‘좋은 크리스천들’ 중 하나로 보이기 위한 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사교적 짐도 져야 한다는 게 문제다.

크리스천들의 이런 반응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꼬리표를 달거나 하나의 분류에 밀어넣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그건 가끔은 옳다. 하지만 미국의 크리스천처럼 체계적으로 특권을 누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영속화되는 영사적 넌센스의 무게를 지닌 정체성이라면 각 개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으론 부족하다. 마치 체계적 인종차별을 해체하며 문제가 있는 백인 개개인에만 집중하면 소요없는 것과도 같다.

크리스천들은 일반적 ‘당신’과 구체적 ‘당신’을 구분하는 법,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기분 나빠하는 에고를 치워는 법을 배워야 한다. 크리스천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개인을 찍어서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모든 크리스천을 하나로 잇는 믿음과 신앙 체계, 그리고 식민주의, 종족 학살, 세계화를 통해 우리에게 이윤을 주는 억압과 그 체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크리스천에 대한 비판이 내 스스로 했던 어떤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는 책임을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수치스러운 일을 직접 했든 안했든, 크리스천을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차별, 식민화, 종족 학살에 대한 집단적 책임이 있는 종교의 일원이다. 넓은 의미의 기독교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에 대한 대중의 시각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누군가가 “모든 크리스천이 그런 건 아니다”의 변주를 입에 올린다면, 이 비판을 가장 들어야 할 사람은 거의 언제나 바로 그들이다. 우리가 다르다는 걸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모든 크리스천이 그런 건 아니다”라는 주장엔 아무 의미도 없다. 물론 옳은 일을 하려 하고, 문제가 있는 기독교와는 거리를 두고, 스스로가 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말에 충실한 행동을 하려는 신앙 커뮤니티들도 있다.

자기 커뮤니티 안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힘을 줄 방법을 찾고, LGBTQ들을 돕고, 예배식과 신학 체계를 바꾸고, 시위에 참가하고 정치적인 인식과 포함, 행동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많다. 그들은 방어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해오던 일을 계속하고, 비판을 받아들이고, 내부에서 크리스천들에 대한 인식 뿐 아니라 우리의 영향과 유산까지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한다.

나는 기독교나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을 읽고 방어적이 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약 뭔가가 나를 건드려서 불쾌한 기분이 든다거나, 내가 책임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경우 나는 내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왜 내 개인에 대해 쓰지 않은 글에 내가 개인적으로 피해자가 되었다고 느꼈는지에 집중하지 않고, 무심코 문제있는 반응을 보였는지 생각한다. 방어와 개인주의 속으로의 침잠이 당신의 에고나 자존감 외에 다른 것 단 하나에라도 유익했던 적이 있는가?

크리스천들은 듣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비판에서 기어나가려고 애쓰는 대신, 크리스천이라는 정체성을 인정할 수 있게 해주는 더 나은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결과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방어적이 되어 이른바 예외적 크리스천이 문제라는 주장을 대화의 중심에 놓을 필요는 없다. 그런 행위는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비판이 아닌, 그 특정 크리스천의 기분에 대한 대화를 끌어낼 뿐이다.

*허프포스트US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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