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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7월 15일 17시 02분 KST

정치중립 헌신은 헌신짝…독재의 수족 ‘기무사 흑역사’

고문조작 전문 기구였다.

한겨레 / 박종식 기자
민간인 사찰 등 국군기무사의 정치 개입 의혹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11일 오후 경기도 국군기무사령부로 차량이 들어가고 있다.

군 정보기관인 국군기무사령부가 또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엄격한 정치중립이 법에 규정돼 있지만, 이를 어기고 정치개입을 한 정황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기무사가 대체 어떤 부대이길래 번번이 이렇게 정치 공작 등을 계속하는 걸까요. 기무사의 과거 역사를 통해 원인을 찾아봤습니다.

국군기무사령부가 다시 개혁의 도마에 올랐다. 최근 기무사는 2014년 세월호 가족들의 활동을 사찰한 정황이 담긴 보고서가 발견된 데 이어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지난해 3월 위수령 발동 및 계엄 선포를 검토하는 문건을 작성한 게 밝혀졌다. 군 수사 및 방첩, 정보 기관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불법 사찰을 하고 군 병력을 동원해 국민의 평화적 시위를 진압하려 음모를 꾸민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해체 수준의 기무사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기무사는 대통령령인 국군기무사령부령에 법적 근거를 두고 있는 군 수사·보안 방첩 부대이다. 국군기무사령부령 1조는 기무사 설치의 목적을 “군사보안, 군 방첩 및 군에 관한 첩보의 수집 처리 등에 관한 업무 수행”이라고 밝히고 있다.

2조는 “국방부장관 소속으로 설치한다”고 돼 있고, 3조에선 기무사의 직무를 △군사보안 및 군 방첩업무 △군 첩보의 수집·처리 △정보작전 방호태세 및 정보전 지원 △내란·외환·반란·군사기밀누설·국가보안법 위반 등 군사법원법 44조2호에 규정된 특정범죄 수사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직무 범위는 군인과 군무원으로 제한되며, 민간인에 대한 정보 수집 및 수사는 위법이다. 그러나 그동안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의혹은 끊이지 않고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 역사가 어두운 굴곡을 지날 때마다 그 뒷골목에서 음습한 조작과 공작정치의 악역을 맡아오곤 했고, 과거 독재 시절에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과 폭압·공포 정치의 상징이었다. 그 오명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하에게 암살당한 김창룡

군 수사·방첩부대로서의 기무사 뿌리는 1948년 창군과 함께 한다. 기무사의 누리집을 보면, 기무사의 모체는 1948년 5월 ‘조선경비대 정보처’에 설치된 ‘특별조사과’로 돼 있다.

이후 특별조사대,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대로 개편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대폭 확대된다. 전쟁 와중이었던 1950년 10월 육군 특무부대가 창설됐고, 뒤따라 해군 방첩대(1953년 1월), 공군 특별수사대(54년 3월)가 설치된다. 육·해·공군이 각각 따로 방첩부대를 운용하는 3군 방첩부대 체제가 정립된 것이다.

이후 육군 방첩부대(60년 7월)로, 또 육군 보안사령부(68년 9월), 해·공군 보안부대(68년 9월)로 각각 개칭되었다가, 1977년 10월 이들 3군 방첩부대를 통합한 국군보안사령부가 창설된다. 3군 통합 방첩부대인 보안사는 윤석양 이병에 의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폭로를 계기로 1991년 1월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보안사 요원으로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1990년 10월 5일 기자회견에서 고발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증거물. 

기무사는 초창기부터 불법적인 체포와 수사, 사건조작, 정치공작 등으로 논란의 대상이었다. 1950년대 초반까지 방첩부대를 이끌던 김창룡은 심지어 부하직원이었던 군인들에게 암살까지 당할 정도로 군 내부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일제시절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군의 추격·체포 업무를 했던 김창룡은 당시 방첩대장, 특무부대장 등을 맡아,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정치공작과 사건 조작, 전횡, 비리를 일삼았다. 1956년 1월 출근하던 김창룡의 암살을 주도한 허태영 대령은 체포 뒤 “군 민주화을 위해 거사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숨진 뒤 육군 중장으로 추서된 김창룡은 사후에도 입길에 올랐다. 묘비명은 친일 역사학자로 비판받는 이병도가 썼다. 이병도는 묘비명에서 “아! 이런 변이 있을까.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길이) 호국의 신이 될 것”이라고 상찬했다. 또 김창룡의 업적을 기리며 “특히 동난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고 적었다. 그러나 6·25 당시 얼마나 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부역자로 몰려 희생당했고, 군 방첩부대가 얼마나 음습한 정치공작을 자행했는지는 하나둘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김창룡은 현재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돼 있다. 애초 경기도 안양 가족묘에 묻혀 있었으나 1998년 2월 유족들의 요청으로 이장됐다. 당시 육군본부는 “출근길에 피살당한 김씨 병적을 확인한 결과 순직으로 처리돼 국립묘지에 안치될 자격이 있다”며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단체들은 김창룡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출범한 국군보안사령부은 군 수사·방첩기관의 전성시대 시대를 열었다. 보안사는 1977년 10월 그동안 육·해·공군 등 3군에 흩어져 있던 수사·정보·방첩부대를 하나로 통합해 설치됐다. 이에 따라 군내 정보·방첩을 한 손에 거머쥔 막강한 권력으로 거듭났다. 실제 보안사는 3군 통합 수사·정보기관으로 출범한 지 불과 3년 만인 1979년 12월 ‘12·12 군사 쿠데타’로 권력의 정점에 선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10·26 사태’로 맞이한 권력 공백기에 직속상관이던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전격 체포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이듬해인 1980년 5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5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에 따르면, 당시 보안사에 체포돼 육군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한 정승화는 전두환 등 ‘신군부’의 쿠데타를 막지 못한 이유에 대해 나중에 “군이 쿠데타를 방지하는 여러가지 시스템이 잘 작동되어 있는데 그 시스템의 컨트롤 타워가 쿠데타를 일으켜 버리니까 이건 대책이 없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고문조작 전문

제5공화국 창출의 핵심 기구였던 보안사는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 박준병 등 신군부 실세들이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독재권력의 핵심 기구가 된다.

당연히 이 시절 보안사의 이력은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과 간첩사건 조작, 정치공작 등으로 얼룩졌다. 기무사는 인터넷 누리집에 “건군 이후 전 공안기관 검거 간첩의 43%를 검거하는 등 조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국가안보의 최일선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헌신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기무사는 ‘간첩의 43% 검거’ 주장의 근거가 뭐냐는 한겨레의 질의에 13일까지 하루가 지나도록 “확인 중”이라고만 할 뿐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기무사의 간첩 검거는 겉으로는 근거없는 허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11월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는 70~80년대 간첩사건 966건 중 보안사가 수사한 사건이 234건이고, 재일동포 및 일본관련 간첩사건 319건 중에선 73건을 보안사가 맡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보안사가 수사한 간첩사건 중 많은 사건들이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과 회유, 억지 자백으로 조작된 사건이었다는 건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니다. 조영선 변호사는 2015년 10월 한 토론회에서 당시 보안사의 수사를 받은 재일동포의 수기를 인용한 바 있다. 1995년께 작성한 ‘나의 기록’이라는 이 수기는 “만일 내가 북한에 가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북한 지리에 훤했더라면 갔다 왔다고 말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들의 협박과 추궁은 그렇게도 무서운 것”이었다고 당시 살 떨리던 고문 실태를 증언하고 있다.

탐사보도 전문 뉴스타파는 지난 1월 보안사가 조작한 간첩사건의 피해자만 24명이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보안사의 고문기술자들의 실체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추재엽 전 서울 양천구청장은 1980년대 보안사 수사관 재임 시절 민간인을 불법 연행해 간첩 자백을 받기 위해 ‘인간바베큐 고문’, ‘물고문’ 등을 한 것이 인정돼 2012년 10월 법정 구속됐다.

또, 보안사 수사관이었던 고병천씨는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인 윤정헌씨의 재판에 출석해 “고문하지 않았다”고 거짓 증언했다가 지난 4월 위증 혐의가 인정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한겨레 / 신소영 기자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지난 10일 오후 국방부에서 국군기무사를 독립적으로 수사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관련한 발표하고 있다.

당시 보안사의 수사와 고문 현장인 서빙고 대공분실은 중앙정보부(또는 국가안전기획부)의 남산,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과 함께 독재권력 유지의 최선봉으로 꼽혔다. 정식 명칭이 보안사 대공처 6과였던 서빙고 분실의 존재와 실체가 대중에 알려진 계기는 1988년 재일동포 김병진씨의 책 ‘보안사’ 출간이었다.

김병진씨는 2년간 직접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고문과 회유로 조작되던 재일동포 간첩사건의 ‘끔찍한’ 진상을 폭로했다. 2년 뒤인 1990년 10월에는 당시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노무현 전 대통령 등 민간인 1300여명의 사찰 정보가 들어있는 자료를 들고 나와 공개하면서 보안사의 악명은 극에 달한다.

노태우 정부는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보안사의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이 드러나 큰 정치적 이슈가 되자 이듬해인 1991년 1월 군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 금지를 약속하며 보안사의 이름을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했다. 기무사는 누리집에서 부대의 개명과 관련해 “기무(機務)라는 말은 ‘근본이 되는 일’, ‘중요하고도 기밀한 정무’ 등의 의미”라며 구한말 설치된 ‘통리기무아문’과 ‘군국기무처’에서 사용한 전례를 찾고 있다. 새로운 출발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가 느껴진다. 그러나, 기무사의 다짐은 이듬해인 1992년 3월 “기무사가 군 부재자 투표에서 여당 후보를 찍으라고 강요하고 공개투표를 한다”는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으로 빈말이 되고 말았다.


순수 군 정보조직으로 거듭날까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과 정치 개입 등 과거의 불법적 일탈행위가 비교적 최근까지 이어졌다는 건 이번 계엄령 검토 문건의 발견 이전에 이미 국방부의 사이버사 댓글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밝혀졌다.

국방부 티에프는 지난해 10월 이명박 정부 당시 기무사의 이른바 ‘스파르타’ 조직이 정치 댓글활동을 했으며, ‘사이버상 좌파 활동 대응’ 등 보고서를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발표했다. 앞서 2011년 10월엔 기무사 요원 4명이 대학교수 이메일을 해킹한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바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기무사는 뼈를 깎는 개혁을 다짐했다. 지난 1월엔 이석구 기무사령관과 부대원들이 서울 국립 현충원에서 ‘엄정한 정치적 중립 준수 다짐’ 선포식을 했다. 조직 개편을 단행하고 인권보호센터와 인권위원회 등을 설치해 일탈행위에 대한 상시 감시체제를 구축해, 기무사를 본연의 임무인 보안·방첩에 전념하는 부대로 탈바꿈하겠다는 자체 개혁방안도 내놓았다. 국방부도 지난 5월 민·군 합동으로 ‘기무사개혁위원회’(위원장 장영달)를 구성해 개혁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장영달 위원장은 “애초 이달 중순 개혁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이번에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문건이 공개되면서 새 변수가 생겨 추가 논의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번에는 반드시 기무사의 과도한 동향 관찰을 축소하고 민간인 사찰과 정치개입을 근절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과연 이번엔 순수 군사 보안과 방첩에만 전념하는 군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