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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과 로봇

ⓒpeepo via Getty Images
ⓒhuffpost

“미래에서 온 이민자.”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14년 3월에 실은 로봇 관련 특집기사 제목이다. 로봇이 미래에서 현재로 건너온 것처럼 보이는 존재라는 생각은 낯설지 않다. 그럼 로봇이 이민자라는 건 무슨 뜻일까. 친구도 아니고 악당도 아니고 왜 이민자일까.

특집기사는 러시아 태생의 미국 과학자이자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로봇 이야기를 일종의 이민자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시모프의 부모는 그가 세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브루클린에 자리를 잡은 이민자였다. 아시모프가 겪으며 자란 1930년대 이민자들의 정서가 그의 로봇 이야기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로봇은 왜 이민자일까. “불평 없이 시키는 일을 하고, 지루하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고, 자신들이 어떤 면에서는 주인보다 낫다는 사실을 종종 실감하고, 주인이 분노와 공포를 주체하지 못해 저지르는 집단 학살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2018년 한국에서 로봇 이야기는 무엇의 이야기인가? 적어도 이민자 이야기는 아니다. 아름다운 ‘공존’ 이야기에 더 가깝다. 자신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로봇을 놓고 우리는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들이겠다거나, 친구가 되고 싶다거나, 연인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말한다. 몇십 년만 지나면 이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울 만큼 서로 비슷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는 지금 로봇이라는 ‘가짜 인간’과 공존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로봇이 친구가 되고 연인도 되는 것은 각자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지만, 로봇이 난민이 되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난민법 2조는 난민을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기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보호나 복귀를 원하지 않는 경우도 포함한다. 로봇이 난민이 될 수 없는 것은 로봇은 박해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박해의 구실이 되는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이 없고 “정치적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로봇은 아무리 인간처럼 보인다고 해도 결국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로봇과 ‘공존’하자고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로봇이 절대 난민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로봇에게는 역사, 문화, 종교, 신념 등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기도 하고 위험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들이 없으므로, 그냥 우리 사이에 들어와서 살아도 골치 아플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로봇은 누군가에게 박해받을 일이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위협이 될 일도 없어 보인다.

로봇의 위험이나 윤리를 따질 때 항상 등장하는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삼원칙’도 이민자나 난민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 아시모프는 1940년대에 발표한 단편들에서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설정하는 원칙 세 가지를 도입했다.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고,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첫째와 둘째 원칙이다. 셋째 원칙은 앞의 두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로봇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모프의 삼원칙은 낯선 땅에서 주눅 들기 마련인 이민자와 난민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각자 해야 할 일을 한다면 자기를 지키며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바람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가 난민에게 느끼는 공포는 지금은 난민이 된 어떤 사람이 자국에서 흡수하며 살아온 역사, 문화, 종교, 신념에 대한 낯선 두려움이다. 그가 체화하고 있는 온갖 낯선 것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느낀다. 이에 따르면 난민은 아시모프의 첫째 원칙부터 지킬 수 없는 실격 대상이다. 난민은 우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없으므로 둘째 원칙도 적용할 수 없다. 난민은 로봇보다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를 두렵게 하는 난민의 역사, 문화, 종교, 신념은 곧 무색무취한 가짜 인간인 로봇과 달리 그들이 진짜 인간이라는 증거가 된다. 난민이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삼원칙’으로 재단할 수 없는 개별적이고 다양하고 복잡한 존재, 즉 인간이라는 뜻이다. 적어도 우리가 로봇을 공존의 대상으로 맞이할 때보다는 더 인간적으로 다가가야 할 상대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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