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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에 내걸린 무지개 깃발

ⓒFACEBOOK/NHRCKR
ⓒhuffpost

폭우가 내리면 길에 갑자기 여러 개의 물웅덩이가 생긴다. 마른날엔 몰랐던 길바닥의 사소한 높낮이의 차이가 금세 크고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어낸다. 신발이 젖지 않으려면 발 디딜 틈을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 바로 이런 곤란함이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곤란함 같다. 첨벙 빠질 수도, 빠지지 않을 수도 없는 갈등들이 매일 새롭게 등장한다. 그러곤 토론이나 숙고의 시간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갈등들은 곧장 청와대의 청원 게시판을 향해 달려간다.

청원이란 국가가 시행하는 법이나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그것의 시정을 요청하는 것을 뜻한다. 기존의 국회 청원도 있지만 작년에 새롭게 만들어진 청와대 청원은 30일 안에 20만명 이상이 동의하면 정부가 공식 답변을 30일 이내에 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까닭에 어떤 청원이 20만명을 넘는지 안 넘는지에 주목해서 흥미진진한 경기를 관람하듯이 다루거나, 누군가를 사형시켜라, 자격을 박탈하라와 같이 순간적인 분노의 감정이나 편견과 혐오를 그대로 쏟아내는 경우도 많다.

지난 10일에 20만명을 넘는 국민청원이 하나 나왔다. ‘대구 동성로/서울 시청광장 퀴어행사(동성애축제) 개최를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다. 오는 7월14일 토요일에 ‘제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서울광장에서 열리는데 그 개최를 막아달라는 것이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광장을, 광장 대관 규정에 따라 적법한 절차를 거쳐 개최되는 행사인데도 이런 청원을 넣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규정을 만들어서 정부가 적극 금지하라는 의미가 된다.

중복 투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청원에 투표하라는 독려 문자가 보수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돌았다는 점 등에서 조직적인 숫자 올리기도 의심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쳤든 결과적으로 정부는 한 달 안에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과연 어떤 답변을 하게 될까?

국가 최고 기관인 청와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는 향후 한국의 성적소수자 시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를 치를 때부터 이 사안은 유독 힘들어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만큼 성적소수자 인권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다만 원만한 국정 운영을 위해 원만한 지지율을 유지해야 하기에, 격렬한 갈등을 일으킬 여지가 있는 주제를 안고 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하다. 이런 부담은 청와대뿐만 아니라 중앙행정기관들과 거의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들이 모두 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희망이 사라진다고 느끼는 때에, 국가인권위원회가 모범적인 결단을 내렸다.

7월12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에 무지개가 걸렸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건물 외벽에 무지개색 깃발이 걸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제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맞이하여 성소수자의 인권 증진과 혐오 표현을 개선하기 위한 인권시민사회단체에 대해 지지와 연대의 의미로” 무지개 깃발을 건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정부 기관으로서는 최초라는 점도 뜻깊지만, 더 새겨볼 지점은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 몇 년간 민원을 빙자한 엄청난 공격과 해체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부담이 컸을 텐데 결국 ‘인권 옹호’라는 대원칙을 지켰다는 점이다. 2001년에 김대중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했던 그 이유에 부합하는 행보다. 국가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

연결하여 떠오르는 또 다른 중요한 장면이 있다. 지난 5월17일,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기념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무지개 깃발을 들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징계하려고 하자, 학생들은 “우리의 무지개는 ‘동성애 옹호’의 상징이 아닌, 우리 공동체 내에 있는 이들에게 전하는 사과와 위로, 화해와 평화의 무지개였다”고 취지를 밝혔다. 종교가 약자를 보듬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하는 모습을 보고 기독교 정신이 가진 가장 순수한 원칙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국민들의 의견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차이가 편견이나 혐오, 폭력과 유언비어 등에 기초하여 증폭되는 상태라면 정부가 앞장서서 명확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 사회에 깊이 파인 물웅덩이를 메우는 데 도움이 된다. 종교는 그런 순간에 사람들이 발 디딜 마른땅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비가 온 뒤에 무지개가 뜨는 것은 먹구름을 헤치고 햇빛이 나오는 순간이다. 무지개 깃발은 그런 의미다. 우리에겐 더 많은 무지개가 필요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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